정성태 [시집] 194

부재

부재 언제쯤 미몽에서 깨어 내 안의 낯익은 두려움을 몰아 낼 수 있을까. 회색 공포가 밀려드는 시각 도무지 잠은 오지 않고 진원은 더더욱 선연히 날을 새우며 밝은 데 격정과 슬픔이 마구잡이로 교차하는 숱한 기억의 파편 사이로 혼란스레 타오르는 일그러진 분노. 소스라치듯 죽어가는 초췌한 모습 그 언저리 어디쯤에서 부르르 몸을 떨며 여전히 나는 부재 중. 詩 정성태

전언

전언 묻지 마십시오 기억할만한 것이 없으니 또한 드릴 말씀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별은 어느 순간에도 가슴 메이는 것을, 문득 일어서는 이승의 뒤안길에서 꽃잎은 애달게 흩어져 내리고 또 길을 떠난 철새의 일단을 보았습니다. 탁하게 들이킨 담배 연기가 내 약한 위장을 침범할 때 다짐했던, 돌이켜보면 사뭇 처절한 결단의 때가 있었건만 여전히 흡연의 폐해는 위통을 동반하고 나는 또 이별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니 더는 묻지 마십시오. 벌써 문 앞에 다다른 그림자 하나, 나는 여태껏 그것을 꿈이라 이름합니다. 詩 정성태

정성태 [시집] 2024.07.03

무거움이 지는 밤

무거움이 지는 밤 한 겹 지더니 또 한 겹의 무거움이 진다. 네모난 상자곽 속에 촘촘히 박힌 일상의 기대와 혹은 절망의 파편이 하나 둘씩 꺼져 가는 밤, 오밀조밀 뒤엉켜 가지런한 정형의 군락을 이룬 채 오늘도 숱한 얘기와 사연이 오고 갔을 저 숭고한 어둠의 조락. 자기 몫의 무거움 만큼 맑고 따뜻하기에 가난할 수밖에 없는 여린 풀잎들에 대한 나지막하고 거룩한 찬미. 아직 남은 불빛 사이로 또 한 겹의 무거움이 진다. 詩 정성태

정성태 [시집] 2024.06.22

눈 내리는 거리에서

눈 내리는 거리에서 가슴 시린 사람들 머리 위로 혹은 꽉 움추려든 어깨 위로 눈 내리는 신작로가 길다. 해 짧은 날의 간극만큼 이승의 인연도 그러했으면 좋으련만 모질게도 질긴 것이 명줄이라고 어쩌면 저기 눈 쌓인 신작로만 같다. 푹푹 빠지는 발길 날은 춥고 걸음은 지친데...... 詩 정성태 정성태 시집 "나이 마흔 넘은 진짜 총각이 쓴 연애시" 에서 발췌

정성태 [시집] 2024.01.10

복음에 대하여

복음에 대하여 그의 행위를 살펴 봄으로 그의 의를 아나니 어떤 이는 선한 말을 하더라도 그 마음에는 숨겨진 독이 들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이는 그가 비록 악한 말을 하더라도 그 가슴에는 흐르는 꿀물을 담고 있나니 말만 있는 자는 그의 이웃에게 따습게 하라 하고서도 뒤돌아서서는 그 이웃의 남은 땔감마저 빼앗는가 하면 행동하는 자는 그의 이웃에게 게으름뱅이라 저주하고서도 은밀한 중에 그에게 필요한 땔감을 주나니 이러므로 사람의 의는 그의 말에 있지 아니하고 그의 행위에 있음이라 그러나 그 모든 의를 행함에 있어서는 사랑에서 발원하여 사랑으로 완성되어져야 하나니 행위는 의의 표징이 되나 사랑은 믿음의 산 증거가 됨이라 그러므로 말만 있는 믿음은 심판 날에 그의 믿음이 불타는 아궁이에 내던져질 것이며 행함만 ..

정성태 [시집] 2023.12.24

가을산에서

가을산에서 가을은 산으로부터 온다 산봉과 산봉을 맞닿은 운무 거기 정령들의 두런거리는 숨결과 함께 찰나를 살아 영원을 이어가는 그 새긴 뜻은 전 우주를 돌고도 남아 다시 불그레한 가을을 부르는데 이제 누구 있어 깨달아 알까 죽어 흩어진 얼굴들이 한데 모여 저렇듯, 무욕의 깨끗한 풍광을 살아감을 계절이 돌아가는 이 즈음 서성이는 마음은 잎새만이 아니어서 아직 제 길을 찾지 못한 내 번고의 뜨락도 젖어 운다. 詩 정성태

정성태 [시집] 2023.11.12

당신 창가에 쏟아져 내리는 별이 되어

당신 창가에 쏟아져 내리는 별이 되어 어둠은 깊이를 모르고 잠들어 가는데 나는 오늘도 당신을 그리며 밤을 지샙니다. 당신이 못내 생각나 어느 하루도 온전히 잠 못 이룬 채 마냥 사무치는 내 안의 그리움을 당신은 조금이라도 알고 계시는지요. 당신이 보고 싶어서 몇 번이고 큰 소리로 속울음을 웁니다. 그러나 이제 또 내가 당신을 얼마나 더 크게 불러야 내 혹독한 추억의 빗장으로부터 당신을 잊을 수 있을런지요. 여전히 당신을 사랑하지만 그러나 당신을 잊어야 하는 슬픔이 남아 있습니다. 당신의 정겹고 따스한 미소와 함께 했던 많은 일 모두 이제는 총총히 돌려 세워야 하는 이런 내 마음을 당신은 듣고 계시는지요. 당신과의 아름다운 기억을 편지로 적어 오늘은 촘촘히 하늘에다 띄우렵니다. 어디서든 가슴 태우지 않고도..

정성태 [시집] 2023.10.03

그에게 가는 길

그에게 가는 길 밤이 이슥토록 내 안에 뿌리 채 배어든 가장 애틋한 길을 홀로 걷습니다. 마음은 한 달음인데 그에게 가는 길은 아득하기만 하여 자꾸 꿈속을 헤매는 것만 같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이 얼마간의 긴장과 고통을 수반하는 결코 쉽지 않은 일임을 이해합니다. 그럼에도 내게 깃든 이 견디기 힘든 마음의 동통이 꼭 요정의 장난만 같아 기묘합니다. 오늘도 먼 곳에 있는 그에게 내 가늠할 수 없는 그리움을 담아 여전히 밤이 이슥토록 길을 걷습니다. 詩 정성태

정성태 [시집] 2023.07.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