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태 [칼럼]

대통령 하야 발언과 추석 명절에 드는 단상/정성태

시와 칼럼 2005. 9. 16.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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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 없다"란 말이 있습니다. 흔히 부모의 자식에 대한 내리 사랑을 뜻할 때 쓰입니다. 추석 명절을 앞두고 갑자기 이 말이 생각나는 연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국내 최대 재래 시장인 남대문 상인들에 의하면 추석 경기가 지난 IMF 때보다도 못하다고들 합니다. 어디 비단 골병 든 나라 사정이 이뿐이겠습니까. 안팎으로 어느 곳 하나 성한 곳이 없는 것이 사실이지요.

이를 반영하듯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은 고작 20% 초반에 머물고 있습니다. 집권 여당인 열린당에 대한 지지율도 10% 중반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잘 이해되지 않는 최근 여론 조사 내용이 있습니다.

대통령과 정부 여당의 총체적 무능에 대해서는 정확히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정작 대통령의 조기 사임에 대해서는 반대한다는 입장이 더 높게 나타나고 있다는 점입니다. 아직도 대통령을 무슨 신성불가침의 국부로 여기던 왕조 시대의 인식이 우리 국민의 무의식 사이에 존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이쯤에서 갑자기 궁금해지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 없다"는 선대들의 말씀을, 정작 대통령 자신은 국민을 향해 간직하고 있는 것인지 말입니다. 이러한 물음 앞에 서면, 우리 국민들 마음이 참으로 바보 같을 정도로 곱고 선하다는 생각에 머물게 됩니다.

아무튼 작년 盧 대통령에 대한 국회 탄핵안도 굳이 우리사회의 보혁이란 측면에서만 보자면 대단히 진보적인 일이었지요. 그러나 거대 방송사의 잘 짜여진 각본에 따라 연일 시시각각 계속되어진 눈물쇼와 여기에 일방적인 대통령과 여당 편들기식 보도로 인해 여론이 왜곡되게 흐르긴 했지요.

그리고 1년 반이 흐른 지금, 대통령 스스로가 자신의 입으로 조기 사임에 대한 뜻을 밝혔습니다. 이 역시 진보적인 발언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게 비록 대통령 자신의 국정 수행 역량 부족에 따른 심리적 압박감에서 연유한 것이든, 또는 자신의 지지자를 결집시키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이든 아니면 정치권 빅뱅을 통한 盧 대통령 자신의 레임덕을 최소화하고 아울러 퇴임 이후에도 영향력 확대를 노리는 것이든 간에 말입니다.

이유야 어떤 것이든, 갈수록 대통령에 대한 여론은 극히 좋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막상 대통령의 조기 사임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여론이 더 높은 심층적인 기저에는, 우리 국민의 대체적인 성향이 기실 보수적인 쪽에 더 가깝다는 생각을 갖게도 됩니다.

그런데 참으로 재미있는 현상은, 자신의 정치 성향이 보혁 가운데 어느 쪽인가를 묻는 질문에는 스스로가 진보주의자라고 답한 비율이 더 높게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서도 역대 대통령 가운데 박정희 전 대통령을 존경한다는 응답도 절반 이상을 차지합니다.

 

아마도 보혁에 대해 기준이 개별적 가치에 따라 각기 다른 때문으로 여겨집니다. 또한 먹고 사는 것을 해결하지 못하고선 말짱 도루묵이란 뜻으로 읽히기도 합니다. 여기에 보혁을 가르는 기준을 어떻게 정할 것이냐 하는 난감한 문제가 남기도 합니다.

그러나 제 입장에서 말하자면, 보수적 가치와 진보적 가치가 서로 상호 작용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습니다. 지킬 가치가 있는 것에 대한 보수성과 그리고 개선해야 할 것에 대한 진보성 같은 것 말입니다.

가령 우리가 역사를 기록하고 또 배우듯이, 가족의 면면을 족보로 기록하는 것과 같은 것은 충분히 지킬 가치가 있는 보수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신분제도나 남존여비와 같은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니 오해는 없으셨으면 합니다.

그런가 하면 대통령의 하야 뜻에 대해서도 이를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는 진보적 역량도 갖춰야겠습니다. 대통령께서 자신의 무능함이 오죽 견디기 힘들었으면 하야를 입에 담겠습니까. 그것도 여려 차례에 거쳐서 말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계속 그 자리에 머물게 한다는 것은 거의 고문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대통령께 가하는 우리의 고문 행위도 멈춰져야겠습니다.

아울러 우리 사회의 변화를 꾀함에 있어서도 예전 군부독재 세력에 항거하던 방식은 이제 지양되어야 하겠습니다. 나와 상대의 가치가 상충될 때, 마치 상종 못할 적으로 여기고 죽기 살기 식으로 싸우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다만 법과 상식의 울타리 내에서 합리적으로 진행되면 족하겠다는 생각입니다.

말이 길어졌습니다. 올 추석엔 이런 저런 불우 시설을 찾는 단체나 개인도 현격하게 줄었다고 합니다. 보선을 앞두고 선거법에 저촉되는 문제도 있지만, 아무래도 가장 큰 이유는 경제적 사정이 매우 악화된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송편 한 조각 나누는 자세로 나보다 못한 이웃을 살폈으면 하는 마음 크고도 깊습니다.

다들 어려운 추석 명절인지라, 모두 즐겁고 복되시라고 하면 자칫 혀를 차실 분이 많겠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즐거움과 복을 구하시기를 빌어 봅니다. 대통령이야 잊을만하면 하야를 입에 올려서 순결한 국민의 심성을 어지럽히지만 그러나 국가의 안전은 빈틈이 없어야겠고, 또 국민은 어떻게든 이 어려움을 잘 견뎌내서 밝고 희망찬 내일을 맞아야겠습니다.

 

시인 정성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