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종대왕이 창제한 한글은 오늘날 인공지능과 디지털 시대를 맞아 그 과학성과 우수성을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한글이 지금과 같은 위상을 갖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련을 겪었다. 폭정을 일삼던 연산군은 자신을 비판하는 내용의 벽보가 한글로 작성되었다는 이유로 한글 사용을 금지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권력이 국민의 정당한 비판을 두려워 할 때 가장 먼저 표현의 자유와 제도를 억압하려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자 역사적 사례라 하겠다. 권력이 법과 제도를 자신의 편의에 맞게 악용하려 할 때 결국 국가의 근간이 흔들리며,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간다는 역사적 교훈이다.
오늘날 우리사회 역시 법치주의 뼈대를 흔드는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특히 현직 대통령과 직접 관련된 사건을 담당하는 특검이 재판 자체를 종료시키는 결정까지 내릴 수 있다면, 곧장 이해충돌 논란을 야기할 수밖에 없다. 이는 단순한 제도 개선의 차원을 넘어 헌법적 원칙과도 직결된 중대한 사안이다.
사법 정의는 결과만이 아니라 정당한 절차를 통해 완성된다. 이는 직위고하를 막론하고 공히 적용되어야 할 원칙이다. 절차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면 판결의 정당성도 무너지고, 국민의 신뢰도 함께 흔들릴 수밖에 없다. 법적 책임과 정치적 책임의 경계가 모호해질 경우 국민이 사법제도를 신뢰하기는 더욱 어렵게 된다.
물론 검찰 수사에 조작이나 중대한 위법이 있었다면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 하지만 우리 법체계는 이를 시정할 수 있는 여러 장치를 이미 갖추고 있다. 법무부장관의 수사지휘권, 검찰의 공소취소, 법원의 판단, 재심 제도 등이 그것이다. 이를 통해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사안을 굳이 새로운 권한으로 우회하려 한다면, 국민은 그 목적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법치주의는 결과의 정당성뿐만 아니라 과정의 정당성까지 요구한다. 그런데도 사실상 집권세력이 주도한 막강 특검에게 공소취소 권한까지 부여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처사다. 설혹 그 목적이 선한 것이라 하더라도 절차적 정당성을 훼손한다면 그 결과는 또 다른 사회적 갈등을 낳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특검 제도의 핵심은 정치적 독립성과 중립성이다. 실제로 공정해야 할 뿐만 아니라 국민에게도 공정하게 보여야 한다. 그런데 특정 정치세력이 후보를 추천하고 대통령이 최종 임명하는 구조라면 정치적 편향성 의문을 불식시키기 어렵다. 제도에 대한 신뢰는 권한의 크기가 아니라 절차의 공정성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승자독식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선거를 통해 권력을 획득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권력이 스스로를 절제하고 법의 통제를 받는 것이다. 입법부와 행정부, 사법부가 서로 견제와 균형을 이루고 어느 누구도 법 위에 군림할 수 없다는 믿음이 유지될 때 국민은 국가권력을 신뢰하고 따를 수 있게 된다.
법치주의 또한 특정 정권이나 정치세력의 면죄부 발부 혹은 이해득실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국민 모두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최후의 안전장치다. 법 앞에 대통령도, 국회의원도, 일반 국민도 예외가 없어야 한다. 이것이 헌법이 지향하는 법치주의이며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다.
권력은 유한하지만 법은 국가의 미래를 지탱하는 영속적인 약속이다. 법과 제도는 정권이 바뀌어도 계속 남아 국가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해야 한다. 지금 눈 앞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사법제도의 근간을 흔든다면 그 후유증은 미래 세대까지 이어질 수 있다. 역사는 권력이 영원하지 않음을 수없이 증명해 왔다. 이를 자각할 수 있어야 한다.
무릇 법의 존재 이유는 권력 확장이 아닌 감시에 있다.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는 그 원칙 위에서만 굳건히 설 수 있다.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지만, 권력의 한계를 정하는 것은 법이다. 법치주의가 난도질당하는 순간 민주주의도 위태롭게 흔들린다. 오늘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특정 정권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헌법과 법치에 있음을 깊이 되새겨야 할 일이다.
* 필자 : 정성태(시인/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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