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태 [칼럼]

부관참시 당하는 이승만... 배후세력 누구?

시와 칼럼 2024. 8. 21. 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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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이 끼리끼리 패당을 구축해 경쟁상대를 증오하며 제거해야 될 악귀 쯤으로 여기는 최악의 상황을 목도하고 있다. 자신들이 구획한 영역과 이해관계에 따른 왜곡주장과 억지논리가 다반사로 벌어진다. 극단적 괘변이 마치 진실인듯 아무렇지도 않게 포장된다. 거기 국론 분열상도 극심한 양상을 띤다.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한 87년 체제 이후, 우리사회에 지금보다 더 첨예한 갈등과 대립의 소모적 정쟁이 있었던지 소름돋을 지경이다. 역사의 흐름과 시계가 거꾸로 치닫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려운 나날이다. 마치 해방정국을 무섭게 휘젓던 거대한 소용돌이의 늪에 빠져 있다는 느낌을 지울길 없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망을 알리는 항복 선언과 함께 조선은 광복을 맞는다. 하지만 같은해 12월 중순, 미국·소련·영국 3개국이 모스크바에 모여 제2차 세계대전 전후 문제 처리를 위한 외상회의를 개최한다. 이른바 모스크바 3상회의다. 여기서 한국을 5년 동안 신탁통치하기로 최종 합의된다.

애초 이들 3개국 사이에는 의견 대립이 극심했다. 미국은 30년 간의 신탁통치를 원했고, 소련은 즉각적인 민주주의적 임시정부 수립을 주장했다. 영국도 미국 제안에 부정적 입장이었다. 그러한 연유로 인해 결정에 이르지 못하던 가운데 소련이 미국의 제안을 수정한 새로운 안을 제출했다. 이에 미국이 동의하고, 영국도 찬성하며 12월 26일 협정이 체결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기 전에 연합국이 카이로, 얄타, 포츠담 회담 등을 개최했음에도 불구하고 합의가 실패한 이유는 30년 간의 신탁통치를 앞세운 미국 속셈 때문이다. 그러다 소련의 수정안에 따라 합의된 내용은, 한국에 임시민주정부 수립을 앞세우고 한국의 임시정부와 4개국(미국·소련·영국·중국)이 협의하여 최장 5년 간 신탁통치를 실시한다는 것이 골자다.

첫째, 한국을 독립국가로 재건설하고, 민주주의적 원칙하에 발전시키며, 일본 통치의 잔해를 빨리 청산할 조건들을 조성할 목적으로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수립한다. 둘째, 연합국이 한국 임시정부의 수립을 원조·협력할 방안의 작성은 민주주의적 정당·사회단체들과의 협의를 통해 미소공동위원회가 수행한다. 셋째, 5년 이내를 기한으로 하는 4대 강국에 의한 신탁통치의 협정은 한국 임시정부와의 협의를 거쳐 4개국이 심의한 후 제출하기로 되어 있다.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정된 사실관계가 그러했음에도 불구하고, 동아일보에 의한 초대형 오보가 즉각 타전된다. 소련 때문에 신탁통치를 받게 되었다는 선동성 기사였다. 이는 해방 이후 본격적인 좌우 대립의 촉매로 작동되며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그러자 이듬해 1월, 소련의 타스통신이 한국문제에 대해 결정된 내용을 정확하고 상세하게 보도했지만 이미 엎어진 사태를 걷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애초부터 신탁통치안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식민지 상태였던 국가들의 전후처리를 위해 미국에서 만든 사실상의 또 다른 식민지 정책이었다. 이는 한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통치 주체를 놓고서도, 미국은 4대국 협의체로 둘 것을 주장했다. 반면 소련은 임시정부가 통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강력 표명하며 그대로 관철시켰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도 완전히 정반대되는 소식을 내보냈다. "소련이 한국의 신탁 통치를 원했으나, 미국이 즉각적인 독립을 주장했다"는 취지였다. 실제로는 미국이 신탁통치를 원했고 소련이 반대했던 것을 뒤바꿔 내보낸 것이다. 특히 임시정부가 통치 주체이며, 최장 5년의 기간을 거쳐 자유 총선거에 의한 통일독립국 건설 보장 등의 합의 내용은 아예 보도되지 않았다. 그러면서 새로운 식민통치가 시작되는 것처럼 기사가 작성됐다.

이러한 동아일보 오보 사건은 일본에서 발행하던 미군 신문인 '태평양성조기' 보도 내용을 그대로 옮긴 것이었다. 심지어 보도된 날짜까지 일치했다. 국내 언론이 같은 날 보도하기에는 시간적으로 무리가 따르는 일이었다. 또한 당시 미국의 신탁통치 정책은 국내외 언론인들 사이에 이미 충분히 알려져 있었다. 더욱이 미군정은 국내 기사들을 철저히 검열했다. 따라서 어떤 세력이 고의적으로 오보를 계획했고, 미군정은 이를 묵인했다는 의혹을 낳게 하는 지점이다.

동아일보 왜곡 보도가 지면에 실리자, 김구 선생을 비롯한 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한국민주당 등 우익세력의 반탁 입장은 매우 강경했다. 이튿날에는 이승만 박사가 포함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가 결성되며 즉각적으로 반탁운동이 전개됐다. 오랜 기간의 식민지배에서 이제 막 벗어난 상황에서 또 다시 신탁통치를 받는다는 것은 대중의 분노를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그런 가운데 신탁통치 찬성 입장을 표명했던 한국민주당 소속 송진우 선생이 1945년 12월 30일 암살된다. 오보를 주도한 동아일보 사장이기도 했다. 이튿날 김구 선생과 임시정부는 신익희 내무부장 명의로 미군정의 모든 한인 관리와 경찰들은 임시정부의 명령에 따를 것을 선포했다. 하지만 미군정 하지 사령관(중장)은 이를 쿠데타로 규정하고 임시정부를 위협하며 강경하게 대응했다.

한편 여운형 선생의 조선인민당, 박헌영 주도의 조선공산당 등도 모스크바 3상회의 결의를 납득하기 어려웠다. 패망한 일제 대신 미국, 영국, 소련에게 사실상 식민지배를 당할 수 있다는 위기감이 팽배했다. 때문에 보도 직후에는 조선공산당도 공식적으로 신탁통치안 반대성명을 발표했다. 이후 타스통신에 의해 정확한 사실 내용이 알려지자, 이후로는 모스크바 미소공동위원회 성공과 임시 민주정부 수립을 주장하며 신탁에 찬성했다. 한국의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국제적 합의로 여겼던 셈이다.  

하지만 반탁과 신탁을 계기로 좌우 대결이 확고하게 형성된 측면이 강하다. 해방 공간의 정치구도를 결정지으며 좌우 격렬한 갈등과, 미국·소련의 대립 양상까지 복합적으로 작동하며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그러한 와중에서 여운형·장덕수 등도 암살당한다.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던 김구 선생도 암살을 피하지 못했다. 더욱이 하나의 정부를 세우지 못한 채 끝내 남북으로 갈라졌다는 점이다. 이는 동족상잔의 참혹한 비극으로 이어졌다.

해방 이듬해, 남한에서는 속칭 '빨갱이' 색출이 본격 시작됐다. 우익들은 좌익들에게 민족을 배반하고 소련에 나라를 팔아먹는 세력으로 매도했다. 권력욕 때문에 식민통치 연장에 동의하는 세력으로 낙인 찍은 채 좌익 인사에 대한 테러도 다반사로 일삼았다. 미군정의 탄압도 극심해졌다. 일제의 식민통치에 동조했던 이들 다수가, 이제는 미군정에 협력하며 치안, 행정 등을 맡았다.

이들이 우익세력의 반탁운동에 숨어 독립을 주장하는 역사의 아이러니가 연출됐다. 자신들의 친일 흔적을 지우고 좌익에 맞서는 '반공투사', '애국자'로 둔갑시킨 것이다. 과거 신분을 세탁하기 위해 더욱 열정적으로 반탁운동에 가담하며 좌익 인사 탄압에 앞장섰다. 특히 일제 관동군 밀정으로 독립운동가를 모질게 유린한 이종형 등이 대표적이다. 아울러 친일경찰 김창룡, 노덕술 등도 거론되지 않을 수 없다.

남한을 점령한 미군정은 미숙함 그 자체였다. 한국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기인한 쌀값 폭등과 인플레이션 등 걷잡기 어려운 상황으로 악화되며 민심 이반을 초래했다. 특히 친일 인사 재기용과 이들의 횡포가 잇따르자 미군정에 대한 대중의 불신은 날로 팽배했다. 바로 그 심리적 기저에 우리 정부를 세우기 위한 국민적 열망도 깊어가고 있었다.

마침내 1948년 5월 10일 총선거가 치러지게 된다. 북한 지역을 제외한 남한 지역에만 국한된 총선거에서 전체 의석 200석 가운데 198명의 제헌 국회의원이 선출되었다. 4,3사건이 발발한 제주도 2개구는 무기한 연기된 채 198개구에서 선거가 치러지게 되었다. 초대 국회 운영규정이 없었던 탓에 당선자들은 미군정과 협의를 거쳐 5월 21일 신익희 의원을 위원장으로 하는 ‘국회소집을 위한 준비위원회’를 구성한 후 개원일을 5월 31일로 정한다.

이날 개원한 제헌국회는 대한민국 1대 국회이며 국호와 헌법을 제정했다. 의장에 이승만 박사, 부의장에 신익희 선생과 김동원이 선출됐다. 이후 본격적인 헌법제정에 착수해, 7월 12일 헌법을 제정하고 20일에는 이승만 대통령과 이시영 부통령을 선출하며 제1공화국 태동을 알렸다. 또한 정부조직법, 반민족행위처벌법, 양곡매입법, 국가보안법, 지방행정조직법 등 20여 건의 법안도 제정, 통과됐다.

개원식 당일 개최된 제1차 국회 본회의에서 이승만 의장은 "우리는 민족의 공선에 의하여 신성한 사명을 띠고 국회의원 자격으로 이에 모여 우리의 직무와 권위를 행할 것이니, 먼저 헌법을 제정하고 대한독립민주정부를 재(再)건설하려는 것"임을 천명한다. 이어 "민국(民國)은 기미년 3월 1일에 우리 13도 대표들이 서울에 모여서 국민대회를 열고 대한독립민주국임을 세계에 공포하고 임시정부를 건설하여 민주주의에 기초를 세운 것"임을 분명히 한다.

그러면서 "우리 혁명이 그때에 성공이 못되었으나 우리 애국남녀가 해내해외(海內海外)에서 그 정부를 지지하며 많은 생명을 바치고 혈전고투하여 이 정신만을 지켜온 것이니, 오늘 여기서 열리는 국회는 즉, 국민대회의 계승이요, 이 국회에서 건설되는 정부는 즉, 기미년에 서울에서 수립된 민국임시정부의 계승이니 이날이 29년만의 민국의 부활일임을 우리는 이에 공포하며 민국년호는 기미년에서 기산할 것이요, 이 국회는 전 민족을 대표한 국회이며 이 국회에서 탄생되는 민국정부는 완전한 한국 전체를 대표한 중앙 정부임을 이에 또한 공포한다"고 역설한다.

이승만 의장은 제헌국회 개회사에서 "대한민국은 1919년 임시정부 수립으로 세워졌음"을 명료하게 선언한 셈이다. 연설문 말미에는 '대한민국 30년 5월 31일'로 되어 있으며, 그 아래 줄에는 '대한민국 국회의장 李承晩'이라고 표기돼 있다. 제헌헌법 전문에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했고,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한다"라고 명시한 인물도 당시 이승만 국회의장이다.

이러한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은 1948년 9월 1일 발행된 대한민국 관보 1호에 실린 헌법 전문에 그대로 나타난다. 당시 관보에는 1948년을 대한민국 30년으로 표기하였는데, 이는 1919년을 대한민국 1년으로 기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상해임시정부 법통을 이어받아 해방된 3년 후인 1948년 8월 15에 대한민국 정부를 재건했다는 의미다.

대한민국 헌법은 1948년 7월 12일 제정되고 이후 8차에 걸쳐 개정되는데, 1987년 10월 29일 개정 공포된 헌법 전문(前文)에도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한다"고 못박는다. 아울러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한다"고 명확히 한다.

그런데도 일부 특정 세력들은 대한민국이 1948년 8월 15일 건국됐다며 이승만 대통령을 앞장 세운다. 일제 강점의 수탈과 치욕스런 세월을 정당화하려는 일본에 종속된 무도한 자들이 펼치는 추악한 시도가 아닐 수 없다. 이는 곧 일제가 우리 백성들을 전쟁터와 노역에 동원하고, 어린 여성들을 위안부로 끌고가 능욕했던 악행에 대한 면죄부를 발부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해방정국, 이성적 기제와 합리적 대안보다는 편을 나눈 광기와 무지가 횡행했던 시절이다. 어쩌면 지금의 정치 상황과 너무나 유사한 측면이 강하다. 미군정의 직접적이고 강압적인 개입만 크게 상쇄됐을 뿐, 역사를 제멋대로 왜곡하고 시대를 희롱하는 태도는 별반 다르지 않다. 언제 무슨 일이 터져도 하등 이상하지 않을 지경에 놓여 있다. 도대체 누구를 위해 또 무엇을 위한 일본 밀정 노릇이란 말인가?

* 필자 : 정성태(시인/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