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태 [칼럼]

부활절, 종교의 세속적 도구화를 경계한다

시와 칼럼 2024. 4. 1. 07:29
728x90

행복한 삶은 인간의 대체적 욕구에 속한다. 물질적 풍요도 하나의 유효한 수단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세상에는 자신이 불행하다고 여기는 경우가 보다 많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자리한다. 공정성이 크게 미흡한데 따른 것으로, 구조적 불평등이 삶의 만족도를 저하시키는 가장 큰 원흉으로 지목된다.

그렇다고 양극화 자체만을 놓고 모든 것을 재단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치안, 의료, 교육, 주거, 보육, 교통, 보건, 양질의 일자리 등 국민적 삶의 향상과 밀접하게 관계되는 국가적 역량도 그와 맞물려 설명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분배의 형평성 결여로 인한 극심한 경제적 격차는 사회적 갈등의 주된 요인일 수밖에 없다.

근로에 따른 대가가 왜곡되는 승자 독식주의는 필연적으로 불행을 잉태한다. 특권층의 우월적 지배구조에 의한 부의 쏠림이 심화된 사회는 반드시 부작용을 몰고 온다. 제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가난을 탈피하기 어렵다면 자포자기에 이른다. 날로 늘어나는 비혼과 급속한 출산율 저하도 그와 무관치 않다.

기독교가 고난주간을 지나 부활절 행사를 치렀다. 예수가 자신의 공생애 대미를 고난과 죽음으로 장식한다. 인간된 입장에서 체험할 수 있는 가장 처절한 고통 가운데 스스로를 맡긴 셈이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이른 것과 같이 장사지낸지 3일만에 부활승천한다. 신적 자아를 만천하에 드러낸 일대 사건이다.

이를 신앙하는 것이 기독교다. 그런데 개신교와 가톨릭 공히 교인이 줄었다고 한다. 예배당 건물은 위용을 자랑하나, 거기 신의 부재를 지적하기도 한다. 특히 일부 종교 지도자에 의해 세속적 욕망의 수단으로 전락해 있다는 개탄도 나온다. 종교의 지나친 정치화와 맘몬 숭배가 팽배해 있다는 불신이 따른다.

물론 종교가 신앙의 거울에 비친 최후 보루로서 정치적 입장을 낼 수 있을 것이다. 핍박 당하고 주린 자의 친구로서, 의에 목마르고 애통해 하는 자의 동지로서 자리할 수 있으리라 여긴다. 하지만 그 또한 극히 조심스러울 필요가 있다. 자칫 보혁 갈등 심화와 사적 욕망의 승강기로 전락될 위험성이 매우 높은 까닭이다.

종교의 사회적 기능을 차용해 정치권력과 물욕을 탐한다면 도리어 불신을 자초할 따름이다. 이는 그 자신 뿐 아니라, 신앙의 대상까지 욕되게 하는 악마의 속삭임이다. 스스로를 단속할 수 있는 자정 능력을 지닐 때 신의 음성도 듣게 된다. 그것이 믿음을 향한 구도자의 길이 되어야 한다. 거기 구원의 문도 열리는 까닭이다.

* 필자 : 정성태(시인 /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