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태 [기타]

정씨(鄭氏) 도시조(都始祖) 지백호(智伯虎)와 온양정씨(溫陽鄭氏) 시조 정보천(鄭普天)

시와 칼럼 2024. 3. 30.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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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백호(智伯虎)는 삼한시대 진한(辰韓)의 사로국(斯盧國) 6촌장(六村長) 가운데 한 사람으로 우리나라 정씨(鄭氏)의 도시조(都始祖)다. 고조선 유민으로 기원전 117년에 경주 어느 한 지역인 취산진지촌(觜山珍支村) 촌장이 되었다.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기록도 있으나, 가문을 신성시하려는 후대의 미화 때문인 듯싶다.

신라 개국공신 6명 가운데 유일하게 묘가 발견된 인물로, 경주에 영정과 위패가 모셔져 있다. 건국 공훈으로 516년(법흥왕 3)에 문화(文和) 시호(諡號)를 받았으며, 656년(태종무열왕 3)에는 감문왕(甘文王)으로 추봉되었다. 고려시대의 문정공(文正公) 매포(梅圃) 정진후(鄭珍厚)를 중시조(中始祖)로 한다.

기원전 69년 3월 초하루, 사로6촌(斯盧六村) 촌장들이 자제들을 거느리고 알천(閼川) 언덕 위에 모여 국가를 세울 것을 논의했다. 여기서 알천은 토함산 북쪽 황룡골에서 발원하여 보문단지를 거쳐 동서로 흐르는 북천(北川)의 신라시대 지명으로 추정된다. 이때 나정(蘿井) 곁에 있던 박[瓠] 모양 알에서 혁거세(赫居世)가 태어나는 것을 본다. 이 또한 신화적 미화인 듯싶다.

사로6촌이 진한 내 다른 여러 국가를 복속시킨 후 기원전 57년 4월, 혁거세 나이 13세가 되던 해에 그의 출생을 신이(神異)하게 여겨 박혁거세(朴赫居世)로 이름을 짓고 왕으로 추대했다. 기원후 32년(유리왕 9년)에 사로육촌이 육부(六部)로 개편되면서, 취산진지촌이 본피부(本彼部)로 변경됐다. 그와 맞물려 지백호 5세손인 동충(東沖)이 유리왕으로부터 정씨(鄭氏) 성(姓)을 하사받았다.

이로써 정씨 성이 처음으로 생겨나게 됐으며, 그 뿌리는 경주 정씨다. 이후 동래, 온양, 연일(영일), 진주, 하동, 초계, 청주, 해주, 나주, 봉화 정씨 등 30여 본관이 대종(大宗)을 이룬다. 처음엔 경주 지역과 그 인근에 모두 모여 살다가, 벼슬길에 나서는 등의 이유로 다른 곳으로 옮겨 사는 구성원이 생기면서 각자 자기 지역을 본관으로 삼은 때문이다.

신라시대를 비롯해 역사적으로 명벌(名閥)의 지위를 누렸으며 고려시대 때도 세력을 떨쳤다. 조선시대에는 동래정씨(東萊鄭氏)를 비롯해 경주(慶州), 연일(延日), 온양(溫陽), 청주(淸州), 하동(河東), 초계(草溪), 나주(羅州), 해주(海州), 진주(晉州) 정씨 등이 상당한 세력을 폈다.

이 가운데 온양 정씨(溫陽鄭氏) 시조는 정보천(鄭普天, 900년생)으로 지백호 34세손이다. 부친은 정사맹, 모친은 면천 복씨(卜氏)이며, 외조부가 복지겸(卜智謙)이다. 고려시대 초기에 호부상서(戶部尙書)를 역임하였으며,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에 책록되었다. 시조공 이래 많은 인물을 배출하며 한국민족사에 공헌한 바 크다.

고려말 왕권교체기에 10세손 정희, 11세손 정진, 12세손 정득진은 조선의 벼슬을 거부하고 고려에 충절을 지켜 두문절사(杜門節死) 하였다. 12세손 정득량(鄭得良)은 고려 말에 무관직인 중랑장을 지냈으며 조선 개국 후 판선공감사 제수에 이어 최고 품계인 정1품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에 올랐다.  

보문각 학사였던 친형 정득진(鄭得珍)이 고려에 충성을 바쳐 순절하자 정득량(鄭得良)은 한때 조카를 데리고 이천 조읍리에 내려가 은둔 생활을 하였다. 1412년(태종 12) 사망하였으며 묘는 경기도 이천시 백사면 조읍리에 있다. 온양 정씨 문중에서는 정득량에 대해 가문을 다시 중흥시킨 조상으로 평가한다.

1450년(세종 32) 정득량 손자 정충기(鄭忠基)의 문과 급제, 1504년(연산군 10)에는 정충기 손자 정순붕(鄭順朋)도  문과에 급제했다. 이후 공조(工曹)·병조판서(兵曹判書) 등을 거쳐 중종 때 호조판서(戶曹判書)를 역임했다.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어 우찬성겸지경연사(右贊成兼知經筵事)에 올랐다. 우의정에 이른 그해 온양부원군(溫陽府院君)에 봉해졌다. 시인 정성태(鄭盛台)는 정순붕의 14세손이다.

온양 정씨는 조선시대에 문과 급제자 43명, 우의정 2명(정순붕·정만석), 공신 1명을 배출하였다. 정유(지중추부사), 정예남(영중추부사), 정뇌경, 정광진(대사헌), 정기안(지중추부사), 정유악(형조판서), 정민시(이조판서), 정광한(예조판서), 정창순(예조판서), 정태호(이조판서) 등 10명이 정2품에 올랐고, 정뇌경(충정), 정기안(효헌), 정민시(충헌), 정만석(숙헌) 등 4명이 시호를 받았다.

정씨(鄭氏) 성(姓) 가운데 정신보(鄭臣保)가 원조인 서산 정씨(瑞山鄭氏)는 송나라가 멸망하자, 고려에 건너와 서산(瑞山)에 정착한 경우다. 송나라에서 상서형부원외랑(尙書刑部員外郞)을 지냈으며, 그 아들 정인경(鄭仁卿)은 1254년(고종 41)에 문과에 급제했다. 1299년(충렬왕 25)에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어 정조사(正朝使)로 원나라에 다녀오기도 했다.

낭야 정씨(琅捓鄭氏) 시조인 정선갑(鄭先甲)은 명나라 세종 때 문연각 태학사(文淵閣太學士)를 지낸 정문겸(鄭文謙)의 증손이다. 1644년 청나라의 명나라 침공 때 포로가 되어 심양으로 압송된다. 여기서 봉림대군을 만나 조선 땅에 들어왔다. 효종(孝宗)을 도와 북벌을 추진하였으나, 1659년 효종의 급서(急逝)로 북벌이 좌절되자 중국에 돌아가지 않고 조선에 정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