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태 [칼럼]

애국에는 당파가 없다... 이순신 구명 나선 정탁-이원익

시와 칼럼 2023. 9. 26. 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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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이순신 영정

1592년(선조 25년) 음력 4월,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며 임진왜란이 발발한다.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은 불과 2달도 되지 않아 조선의 거의 모든 영토를 유린했다. 급기야 선조는 왕궁을 버리고 피난길에 올라야 했다.

이후 1598년 12월까지, 무려 7년 가까이 피비린나는 전쟁을 치르게 된다. 그로인해 숱한 조선인이 무참하게 살해되거나 짓밟혔으며 일본으로 끌려갔다. 역사에서 만나는 치욕의 한 페이지가 아닐 수 없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의 신화적 활약은 세계 해전사에 있어 단연 독보적이다. 일본군의 해상 상륙을 원천 봉쇄하며, 그들을 바다에 수장시켰다. 이는 침략군의 보급로 차단으로 이어졌으며, 전라도 곡창지대도 지켜낼 수 있었다.

해상에서는 이순신 장군, 지상에서는 권율 장군이었다. 농민, 승려, 유생들도 곳곳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을 무찔렀다. 바닷속 물길을 꿰뚫고 있던 어민들도 구국의 숨은 주역으로 힘을 보탰다.

그런 한편 1597년 4월, 이순신 장군은 선조의 시기와 원균의 모함을 받고, 한 달 가까이 투옥된 상태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한다. 이때 문초가 한 차례 있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정탁 상소문 '신구차'에 의하면 그 고문의 혹독함이 어떠했을지 유추해 볼 수 있다.

고신으로 거의 죽게 됐으니, 또 다시 형을 가하면 자칫 죽을 수도 있다는 언급이 나온다. 이로 미뤄볼 때 초죽음이 되도록 고문 당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풀려나 권율 장군 진영에서 백의종군할 것을 명령받고 참전한다.

약포 정탁 초상화

당시 선조는 이순신을 죽이기로 단단히 작정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거의 모든 대소신료가 바른 말을 하기는 커녕 오히려 동조하는 상황이었다. 심지어 이순신과 교분이 두터웠던 류성룡마저 그에 가세했을 정도다.

이때 풍전등화 위기에 처한 조국의 운명을 먼저 생각하며 이순신 구명에 나선 신료도 있었다. 정탁, 이원익, 권율 등이었다. 비록 소수에 불과했으나, 그들은 자신의 목숨보다 국가의 안위가 우선이었다.

정탁(1526~1605)은 이순신에 대한 선조의 분노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런지라 이순신이 1차로 고문을 받아 임금의 분노가 어느 정도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섣불리 나섰다가는 이순신을 구하기는 커녕, 자칫 자신마저 화를 입게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이윽고 고문이 끝나자, 정탁은 선조에게 상소문 '신구차'를 올렸다. 먼 바다 전장에서 일어난 일을 조정에서 다 알기 힘들다. 따라서 오해가 있었을 수도 있다. 이순신이 그간 잘 싸운 건 사실이니 임금이 선처해서 다시금 공을 세우게 할 것을 강조하는 내용이었다.

이순신에게 죄가 없다는 취지보다는, 이순신의 목숨을 살려 다시금 전장으로 내보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위난의 국가를 구하기 위한 실리적 해법을 택한 셈이다. 그의 탁월한 정무적 판단이 빛을 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오리 이원익 초상화

그렇듯 '신구차'는 이순신을 죽음에서 구한 명문장으로 유명하다. 결국 이순신은 정탁이 올린 상소문에 힘입어 형벌에서 풀려나게 된다. 그리고 다시 전장에 나서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한다. 그러한 정탁의 처신은 오늘의 정치 외교 현장에서도 때로는 귀감이 될 듯싶다.

이원익(1547~1634)은 선조에게 이순신이 없으면 전쟁에서 이기기 어렵다며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순신 재기용에 큰 힘이 됐으며, 그가 직접 한산도까지 내려가 군사들을 배불리 먹이며 사기를 북돋기도 했다.

그는 격동의 시대에 세 명의 왕에게서 영의정으로 발탁될 정도로 신망 높은 인물이었다. 선조, 광해군, 인조 시대의 혼란한 나라를 바로 잡기 위해 힘썼으며 붕당 정치에 휩쓸리지 않았다.

청백리로서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던 그는 87세에 노환으로 생을 마쳤다. 그런데 집이 워낙 가난해 예를 갖춰 장례를 치를 수 없는 상태였다. 이에 인조가 관재(棺材)의 여러 도구를 보내는가 하면, 세자도 직접 조문에 나섰다.

그의 좌우명 가운데 뜻과 행동은 나보다 나은 사람과 비교하고, 분수와 복은 나보다 못한 사람과 비교하라는 구절이 있다. 그런 그가 일생을 통해 실천한 청빈의 삶은 지금도 여전히 명재상으로 칭송되고 있다.

* 필자 : 정성태(시인 /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