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태 [칼럼]

민주당의 '빨리빨리'에 담긴 '대충대충'... 누구를 위해?

시와 칼럼 2023. 7. 6.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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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을 특징하는 단어 가운데 '빨리빨리'가 있다. 이러한 성향은 엘리베이터 문이 자동으로 닫힐 때까지 기다리지 못한 채 곧장 닫힘 버튼을 누른다. 그마저도 빠르게 작동하지 않으면, 연거푸 두드리듯 닫힘 버튼을 난타한다. 또한 인터넷이 조금만 느려도 표정이 변하며 말투가 거칠어진다.

한편 그에 상응하는 사회적 역동성이다. 이는 짧은 기간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룬 측면이 있다. 그런가하면 자신들이 직접 선출한 대통령마저 탄핵의 소용돌이 속으로 내모는 여론형성의 전위대가 되기도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헌재에서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했으나, 박근혜 전 대통령은 그것을 넘지 못했다.

일제 강점기가 끝나기 무섭게 한국전쟁이 발발한다. 국토의 대부분이 민족상잔의 전란으로 폐허가 된다. 초근목피로 연명해야 하는 경우도 적잖았다. 숱한 사람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내몰린 셈이다. 그야말로 완전한 제로베이스 상태에서, 하루하루가 생존을 위한 분투였다.

당시에는 서두른다고 해결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다. 농업기술도 절기를 뛰어넘어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게 전무했다. 그렇듯 농경문화가 여전한 상황에서 오늘 하루 무탈하면 되는 시대였다. 이 무렵만 해도 "진지 드셨습니까?" 또는 "밤새 안녕하셨습니까?"가 주된 인사말로 통용됐다.

그런 가운데 급속한 산업화 시대가 도래한다. 서둘러 일하는 것이 생산량과 직결되는 환경으로 탈바꿈된 것이다. 빨리빨리 움직이지 않으면 도태되기 십상이 새로운 질서로의 편입이 강요될 수밖에 없었다. 그에 적응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세상이 된 셈이다.

한국인의 빨리빨리 문화, 산업화를 거치면서 체질화된 측면이 높다. 만만디(慢慢的)로 상징되는 중국도 산업화를 거치며 콰이콰이디(快快的)에 가까워져 있다. 물론 우리와 비교했을 때 정도의 차이는 있을 듯싶다. 그 간극이 미래를 어떻게 운명지을지 섣불리 예단할 수는 없다.

빠름과 철저함, 부존자원이 부족한 우리 입장에서는 긴히 요구되는 덕목일 수 있다. 경쟁국에 비해 보다 빠르고 철저하게 생산된 제품, 이는 곧 우리 산업의 경쟁력과 직결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와 함께 휴식의 필요성이 반드시 지켜져야만 선순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빨리빨리, 그에따른 명암도 있으리라 여긴다. 자칫 대충대충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강다리가 붕괴됐고, 삼풍백화점이 주저 앉았다. 가깝게는 건축 중이던 아파트 일부가 무너졌다. 자재 빼돌리기와 함께 빨리빨리가 결부되어 있다. 대충대충해서 빨리 끝내려는 안이함이 대형참사로 이어지게 된 셈이다.

정치 영역에 있어서도 그와 유사한 경우가 있다. 특정 집단 혹은 진영의 유불리에 따른 날림 입법이 속전속결로 강행된다. 그 대표적 사례가 민주당의 검수완박이다. 검찰 권한을 약화시켜서 경찰에게 막강한 힘을 몰아주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로인한 피해는 사회ㆍ경제적 약자일 수밖에 없다.

또한 문재인 정권에 의해 국가정보원의 대공 수사권마저 경찰로 이관된 문제다. 세계가 날로 좁혀지는 생활권이고, 인터넷을 통해서는 실시간으로 정보 공유가 가능한 세상이다. 첩보가 해외에서만 한정되지 않고 국내와 연계되어 있는 경우가 태반일 것으로 관측된다. 국가 안보 공백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됐다.

정치권이 제정신 번쩍 차려야 한다. 자신들 진영 이익을 위한 날림 입법이 함부로 남발돼서는 아니될 일이다. 빨리빨리가 대충대충이 되는 정치권력의 위태로운 전횡은 국가를 파멸로 이끌 뿐이다. 그 무엇보다 국가와 국민을 최우선 순위에 두어야 한다는 점을 따갑게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 필자 : 정성태(시인 /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