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태 [칼럼]

위대한 거인의 삶... 목포 괴짜 명물 멜라콩 박길수

시와 칼럼 2023. 6. 9. 04:13
728x90

호남선 열차가 육중한 몸을 가느다란 철로에 의탁해 서남단 끝자락을 향해 달린다. 그 종착역에 당도하면 어디선가 삼학도 파도소리가 귓전에 들릴 것만 같은 목포역이다. 노령산맥 맨 마지막 봉우리이자 다도해로 이어지는 서남단 땅끝에는 유달산이 자리한다.

멜라콩 박길수(1928~1994), 해방 무렵부터 1960년대 사이 목포에 거주했던 시민이라면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왜소한 체구에 선천적 중증장애를 안고 태어났다. 비록 가난했으나, 그럼에도 그에 굴하지 않고 위대한 삶을 살다간 거인이다. 목포 괴짜 명물로 통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전남 장흥에서 태어나, 12살 때 온 가족과 함께 목포로 이주했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부친은 목포역 앞에서 과일 노점상을 했다. 이때 소년 박길수 삶은 역전 대합실에서 숙식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노숙자나 다름없는 생활이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대합실 안팎을 자진해서 청소했을 뿐만 아니라, 온갖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를 유심히 보아오던 목포역장의 배려로 그가 정모 조수로 발탁된다. 그의 나이 17세였다. 이때부터 역전에서 승객들 짐을 옮겨주는 일을 하게 됐다.

그의 근면 성실함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결근하는 날이 없었다. 불편한 신체와 가난에도 불구하고, 타인을 위한 봉사와 헌신의 삶을 한순간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무려 48년의 세월을 목포역과 함께 했다.

‘멜라콩’이란 별칭이 붙게 된 것은, 그 무렵 크게 히트했던 어느 사무라이 영화 속 극중 인물을 닮아서다. 당시 수화물 노동자들이 입었던 회색 옷에 눈이 움푹 들어가 있어서 다소 무섭게 보이기도 했다. 정장을 입는 경우에는 모자를 반듯하게 썼다.

선생이 목포의 명물로 불리게 된 사연은 1일1선(1日1善)의 삶을 철저히 지켰기 때문이다. 타인의 짐 들어주기, 아이 돌보기, 길 안내, 유실물 찾아주기 등을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아울러 1년1선(1年1善)의 다짐 또한 평생토록 실천했다.

196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목포역 주변에는 개천이 있었다. 하수로와 갯벌까지 그대로 있어, 장마철에는 역사 안쪽까지 물이 들어오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비가 오면 진흙탕이 되어 사람들 통행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불편했다.

그 때문에 하천 건너편에 사는 승객들과 상인들이 목포역으로 가려면 하천 징검다리를 건너야 했다. 그마저 비가 오게되면 징검다리가 잠기게 돼, 진흙탕이 된 5백미터 가량의 길을 돌아서 가야했다. 그 애로사항이 실로 컸다.

이에 그는 사람들이 편리하게 다닐 수 있도록 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된다. 이를 위해 목포시청을 방문하여 다리 건설을 요청했으나, 예산문제로 어렵다는 답변 뿐이었다. 심지어 그의 장애를 빗댄 모욕적인 냉대까지 당해야 했다.

그러자 그는 직접 다리를 놓기로 작정하고 모금운동에 나섰으나, 그마저 쉽지 않았다. 결국 사비를 털어 다리 공사에 들어갔다. 그러자 주변에서 차츰 도움의 손길을 내밀기 시작했다. 특히 자신들도 어려운 처지에 있던 사창가 아가씨들도 후원금을 보탰다.

그렇게 진행된 공사가 착공 5개월만인 1964년 4월에 마침내 완공된다. 하천 위로 멜라콩 다리가 놓이게 된 셈이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다리 건설로만 그치지 않는다. 많은 사람이 어렵던 시절, 세상을 밝히고 어루만지는 다리로서의 상징성을 지닌다.

멜라콩의 기적은 비단 거기서만 머문 것이 아니었다. 1965년 3월, 목포역 승락을 받아 구내에 무료화물 보관소를 마련했다. 당시 역사 이용 승객들은 무거운 짐꾸러미를 들고 불편을 겪는 일이 많았다. 이에 본인 사비와 기부금을 후원 받아 건립한 것이다.

1970년 10월에는 무료 숙박시설도 완공했다. 날씨가 좋지 않은 날, 배가 운항하지 못하면 섬 주민들은 고립됐다. 역사를 배회하는 떠돌이 소년들과 처녀들 또한 그의 마음을 안타깝게 했다. 이들을 위해 목포역 관계자를 설득해 역사 부지 내에 20평 규모의 3층짜리 무료 숙박소를 만들었다. 영남 지역 등 전국을 돌며 모금운동을 펼쳐 이뤄낸 결과였다. 물론 그의 사비도 어김없이 보태졌다.

매년 연말에는 장애인과 불우한 이웃들에게 생필품도 전달했다. 본인 사비와 독지가들 후원을 받아 그들 생활에 보탬이 되도록 살폈다. 자신보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그는 한순간도 봉사의 삶을 놓지 않았다. 현대적 개념의 도시재생, 사회복지 측면의 시대를 앞서가던 선구자였던 셈이다.

위대한 거인 박길수, 그는 가정에서도 사랑을 실천한 인격자였다. 아내를 비롯해 2남3녀의 자식, 처남과 장모가 비좁은 집에서 함께 살았다. 박봉에도 불구하고, 9명 식구의 생계를 책임지며 불평 한마디없이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다했다. 그의 집에서 큰소리 한번 나는 일이 없는, 그야말로 사랑이 넘치는 화목한 가정이었다.

1993년, 그의 나이 65세에 은퇴했다. 이듬해 66세를 일기로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 멜라콩 박길수 선생이 사랑했던 목포와 그 애환이 서린 역사를 뒤로한 채 영원한 안식에 들었다. 불편한 몸과 가난한 형편이었지만, 기꺼이 자신의 것을 내어 준 시대의 스승이었다.

어느덧 세월은 쏜살같이 흘러, 멜라콩 다리가 놓였던 하천은 복개되어 도로가 된지 오래다. 지금은 다리가 있었던 흔적조차 찾을 수 없고, 가로 25cm×세로 45cm의 작은 표지적에 새겨진 초라한 기념비만 목포역사 담장 한켠에 밑돌처럼 박혀 있다.

바라기는, 관계 당국과 목포시가 이를 적극 발굴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비단 멜라콩 박길수 선생을 기리자는 차원만이 아니다. 그것을 통해 강퍅한 시대를 비추는 거울로 삼자는 것이다. 그리하여 수 많은 멜라콩 박길수 선생을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하는 까닭이다.

* 필자 : 정성태(시인 /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