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태 [칼럼]

조국 교수, 문재인 대표의 우향우 우선 추궁했어야/정성태

시와 칼럼 2015. 5. 15.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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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조국 교수가 “호남 민심이 새정치연합에 요구하는 것 세 가지”라는 제하의 기고문을 최근 한겨레신문을 통해 발표했다. 그는 글머리에서 자신이 “1980년 ‘5.18 광주민주화 운동‘의 세례를 받으며 청년 시절을 보낸 사람”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가 1965년생인 점을 감안할 때, 당시 고교 1학년 쯤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부산 출신인 그가 광주에 있었을 리는 만무한 일일 테다. 그럼에도 ’광주민주화 운동‘의 세례를 받으며 청년 시절을 보냈다고 적고 있으니 고마운 생각과 함께 한편 대견스럽게 여겨지기도 한다.

 

1963년생인 필자는 당시 고교 3학년 신분으로 그 참혹한 현장을 직접 목도하고 또 겪었던 사람이다. 독재타도와 민주주의를 외치는 멀쩡한 젊은이들을 무슨 고깃덩이 다루듯 묶거나 질질 끌고 가는 것은 예사고, 군홧발로 짓밟고, 개머리판으로 찍고, 몽둥이로 패고, 심지어 무차별 난사 및 조준사격까지 했던 끔찍한 만행이었다. 자식 잃은 어미, 아비 잃은 어린 자식, 친구 잃은 고교생들의 원통한 절규가 하늘에 사무칠 지경이었다. 그런 와중에 속절없이 찢기고 깨지며 죽어가야만 했다. 온통 피비린내 진동하는 그 한복판으로 총소리가 귓전을 때리며 지나갔다. 그야말로 아비규환의 잔혹한 공포 그 자체였다. 분명한 것은 광주를 피로 물들이던 그 때 그들은 결단코 사람이 아닌 악귀들이었다.

 

이는 총칼을 앞세운 박정희 소장이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했던 과정과 매우 흡사하다. 그게 19년 후에 소위 신군부 세력으로 통칭되는 전두환 소장으로 명찰만 바꿔 달았을 뿐이다. 피에서 비롯해 피로 귀결되고 거듭 피로 일어서는 독재 권력의 또 다른 등장에 불과한 셈이었다. 이에 분연히 맞서 산화해간 광주 시민의 위대한 항거가 바로 5.18 ‘광주민주화운동‘인 것이다. 통상 광주 정신으로 일컬어지는 핵심 요체가 바로 거기에 있다. 이를 불의에 맞서 싸우는 정의로움으로 규정해도 결코 과하지 않을 듯싶다.

 

그러한 맥을 잇고 있는 정당이 오늘 날의 새정치연합일 것이다. 정당사적으로 보면 김대중 전 대통령이 창당한 평화민주당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거대 야당인 새정련에 그러한 정신이 실종되고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한나라당과 연대해 대북정책 특검을 주도하고, 그도 모자라 김대중 전 대통령을 구속할 수 있다고까지 했던 장본인이 다름 아닌 문재인 대표다. 그러나 관련자 모두가 법원에 의해 무죄로 풀려났다. 이는 햇볕정책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을 뜻하는 것으로서, 그것을 눈뜨고 지켜봐야만 했던 참담한 심정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여전히 난감하다. 그야말로 김대중 전 대통령과 호남을 능욕하기 위해 기획된 여론 재판이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다시 조국 교수의 기고문으로 돌아가 보자. 그가 호남 지역 국회의원 및 자치단체장들에게서 나타나는 일단의 문제점 나열에 대해서는 동의할 부분이 있다. 그러나 호남 기득권이란 표현에 있어서는 그에게 어떤 인식의 오류가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영호남 두 지역 간에 있어서 지난 수십 년 동안 소외되고 차별 받으며 고립되었던 지역이 호남이었음은 상식에 속하는 일이다. ‘우리가 남이가’로 통칭되는 공고한 영남 패권주의가 호남을 희생양 삼아 횡행했음을 자각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호남은 기득권 자체가 성립되지도 않을뿐더러, 그럴만한 기득권을 누려본 적도 사실상 없다. 물론 여기서 호남지역 일부 토호세력의 그릇된 행태는 별개로 한다. 그의 그러한 언급은 호남지역 정치인들이 아프게 여길 수 있어야 할 대목이다. 이는 친노, 비노 정치인 가리지 않고 공히 적용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특별히 그가 새정련 내의 극심한 혼란상에 대해 어떤 노선 차이가 아닌 계파 간의 기득권 다툼이 문제라고 밝히고 있다. 이는 일정 부분 맞는 말이나, 또 다른 측면에서는 완전히 틀린 말이다. 지금 새정련이 처한 위기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계파 갈등은 한낱 표피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것은 정치인 그들만의 리그다. 그보다 본원적인 문제는 기실 따로 있다. 문재인 대표 체제의 새정련이 서민과 사회적 약자를 위한 가치와 철학을 전혀 구현해내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오죽했으면 야권 지지층의 적잖은 사람이 문재인 대표와 새정련을 향해 박근혜 정권 도우미 또는 새누리당 2중대란 비아냥거림을 서슴지 않는 실정인지 성찰할 수 있어야 한다.

 

작금 나타나고 있는 새정련 내의 수습하기 어려울 것만 같은 내홍에 대해서도 조국 교수는 교묘히 본질을 회피하고 있다. 그러한 문제에 대해 가장 주의 깊게 살펴야 할 점은 다름 아닌 문재인 대표의 어용적 행태에 있다. 야당으로서 응당 지녀야 할 가치와 철학을 몽땅 내다버린 채 우향우 행보만을 지속했음을 뼈아프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어떤 사안에 대해 책임지려는 자세 또한 현격히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는 욕심스럽게 자리 보존에만 연연하려 든다는 불만을 당 안팎에서 사고 있다. 그와 함께 친노세력만이 모든 것을 독식하려 든다는 인식도 팽배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에 대한 선행적이고 모범적인 자기 성찰과 행동 없이 그저 비노세력만을 공격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점은 그리 설득력을 담보할 수 없다.

 

그러다보니 문재인 대표 스스로가 혁신의 대상이 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이는 비단 문 대표 한 사람으로만 국한되는 문제는 아닐 테다. 친노, 비노 가리지 않고 최소 절반 이상은 작금의 시대정신을 담아내기에는 부적절한 정치인으로 분류되고 있다. 국민 다수가 처한 고통스런 삶에 대한 고뇌와 고통어린 흔적이 별반 찾아보기 어렵다. 불평등 구조의 심화로 인한 서민과 사회적 약자가 처한 생활상은 아프고 서럽기 한이 없다. 정치 쇄신의 과제도 첩첩산중이거늘, 어느 것 하나 국민 눈높이에 맞추고 있지 못하다. 도대체 국회의원이 왜 있어야 하고, 특별히 야당의 존재 가치를 전혀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새정련 전체가 혁신의 대상으로 전락되어 있다. 일각에서는 타도해야 할 대상으로 삼고 있기도 하다. 그 주된 원인이 새정련과 문재인 대표의 보수성에서 기인하고 있음은 삼척동자도 알만한 사실이다. 다만 문재인 대표와 그 측근 그룹만 모를 뿐이다. 아니 애써 귀를 닫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현재 새정련의 가장 큰 문제는 야당이 야당으로서 자기 구실을 전혀 하고 있지 못하는데서 비롯되고 있음을 뼈아프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박근혜 정권 눈치나 보며 질질 끌려다니는 야당 대표를 도대체 그 누가 인정할 수 있겠는가? 자꾸만 추한 모습을 보이며 더 이상 망가지기 보다는 오히려 물러나야 할 때를 깨달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시인 정성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