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태 [칼럼]

모반과 역린의 시대/정성태

시와 칼럼 2010. 10. 22. 0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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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기가 다들 어렵다고 한다. 극빈층이 날로 늘고 있는 실정이고, 이를 반영하듯 점심 끼니를 거르는 학생도 그에 비례해 상승하고 있다. 급기야는 우리사회 내부에 굶어 죽는 사람까지 발생하고 있다.

주말에 전해진 짧은 기사 한 토막이 아직 머리속에 아른거린다. 대구에서 일어 난 일로, 5세된 아이가 영양실조로 사망했다는 내용이다. 그런가 하면 어느 공중파 방송을 통해서는 한 집안에 사는 어린아이 네 명이 배고픔을 견디다 못해, 말라가는 무우와 그 잎파리를 씹어 먹는 장면이 방영됐다. 전남의 한 시골마을 외진 곳에서 생겨난 일이 휴일 밤 시간을 내내 우울하게 한다. 그런데 과연 삶의 곤궁에 좇겨 추위와 굶주림에 떨고 있는 사람이 어디 이들 뿐이겠는가.

참으로 가슴을 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정치권 전반에 대해 갖는 불신과 통탄스런 마음이 앞선다. 더욱이 틈만 나면 서민을 위한 국가경영을 하겠다고 입버릇처럼 대뇌이던 대통령과 정부 여당의 구호가 가증스럽게까지 여겨진다. 국가권력 그리고 정치와 경제성장이 도대체 누구를 위해 필요하고 또 존재해야 하는 것인 지, 근본적인 회의감마저 밀려든다.

그런데 문제는 또 있다. 전제된 불행한 사연들이 시스템의 오작동 또는 방치에 의해 기인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그들의 부모가 정신장애를 겪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관계 공무원이 서류미비라는 이유를 들어 되돌려 보냈다는 것이 잘 증명하고 있다. 결국 행정기관의 무관심 내지 소홀에 의해 기초생활수급을 받지 못해 발생한 일이다. 철밥통을 포기해야 될 사람들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는 뜻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식량사정은 풍족한 상태다. 수입쌀은 창고에 쌓인 채 점점 해묵은 것이 되고 있다. 그런지라 양곡 재고량은 오히려 부담이 되고 있는 실정이고, 이에 대한 보관료도 적잖이 소요되고 있는 현실이다. 그런데도 정작 우리시대에 굶어죽는 사람이 생기고 있는 이 기막힌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된단 말인가. 더더욱 국민소득 2만불 달성을 목청껏 높이고 있는 첨단 우량시대에 말이다. 이는 분명코 국민에 대한 모반이다. 백성이 하늘이라 했음을 깨닫는다면 지금 우리는 역린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가난은 가난한 사람만이 안다고 했던가. 구중궁궐에 갇혀 사는 분이 어찌 서럽고 고단한 자의 피눈물을 한 치나 알 수 있으랴. 고관대작에 계신 분들도 그렇거니와, 쌈박질 하느라 여념이 없는 국회의원 나리들께서도 또 어찌 춥고 배고픈 자가 흘리는 원망스런 사정을 이해할 수 있으랴.

가난을 아는 가난한 우리라도 따뜻한 마음 한 자락 건넬 여유를 지녀야겠다. 사람 사는 것이 정녕 무엇이겠는가? 나눔과 베품은 결코 미덕이 아닌 우리 모두가 살아 남을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대안이 아니던가. 한 사람, 한 사람이 같은 마음을 넓혀가고 또 이러한 마음들이 서로 한 데 모일 때 보다 나은 세상을 열어 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날이 추워 질 수록 더더욱 크고 절실하게만 느껴진다.

대통령을 위시한 고관대작 그리고 재벌에 대한 국민적 불신과 분노가 끝내 치밀어 오르는 민란의 소용돌이로 번지지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이를 자각할 수 있을 때, 국민의 신망과 존경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한 치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생각나는 아픔들을 떠올리며 지금은 그저 작은 눈물 한 자락 머금고 간다. 

시인 정성태 

2004년 12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