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태 [칼럼]

김진홍 목사의 역사 인식 유감/정성태

시와 칼럼 2010. 9. 29. 0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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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이 선포되기 한 해 전이던 1971년, 서울 청계천에 활빈교회를 만들고 빈민목회를 이끌었던 김진홍 목사. 이후 유신 반대 시위를 주도하다 구속되기도 했던 그가 며칠 전 스스로를 보수주의자로 선언하고 나섰다.

그는 자신의 그러한 배경에 대해 “변절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진보주의자에서 보수주의자로 성숙해졌다”고 밝히고 있다. 이는 유신과 5공 독재를 긍정적으로 여긴다는 것과 하등 다르지 않은 망언으로써 그의 표현력이 부족한 탓인지, 그게 아니라면 구질구질한 변명을 위한 싸구려 치장으로 여겨야 하는 것인지 참으로 당혹스럽기만 하다.

그렇다면 서유럽의 안정적인 많은 나라들이 우리사회 내의 보수세력들에 비해 세상을 보는 눈이 좁아서 오늘 날 세계국가의 부러움을 사는 평화와 번영을 구가하고 있단 말인가? 또한 한국사회 내의 상당수 지식인과 원로들이 김진홍 목사보다 성숙하지 못해서 우리사회의 구태를 벗겨내기 위한 주문을 활발히 펼치고 있단 말인가?

지난 날, 역사의 흑빛 속에서 386 세대들에게 적잖은 정신적 자양이 되기도 했던 그가 어쩌다 이리도 철저히 망가지게 된 것일까. 빈민구제를 위해 열심을 내어 활동했던 그의 노력이, 자신의 어떤 신념이나 철학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는 지극히 감성적인 울타리에 머물렀다는 뜻으로 여겨져 안타깝기 그지없다.

빈곤을 숙명처럼 안고 살아가는 이들을 보면서 냉혹한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누구나 지니게 되는 연민의 감정은 있다. 그런데 김진홍 목사에게 있어서도 그런 정도의 인식 밖에는 없었다는 뜻으로 이해되는 것이 지나친 비약에 불과한 것일까. 필시 그에게 있어서 자신의 출세를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철저히 활용되진 않았는지 의아스럽기만 하다.

더욱 가관인 것은, 수 만 명에 이르는 자신의 회원들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386 정치인들을 지칭해 “주사파들이 국회의원이 되었다”고 단정지어 말하는가 하면,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서는 “우리사회에 독이 됐다”라는 파렴치한 주장에 이르러서는 아연 말문이 막히게 된다. 야만의 역사를 온몸으로 부대끼며 견뎌낸 시대적 항거에 대해 어찌 그리도 저급한 시각을 갖고 있단 말인가. 그들 때문에 공산화 통일이라도 되었다는 뜻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물론 386 출신 정치인들이 아직 여러면에서 미숙하고 또한 적지 않은 점에서 자기 수양이 필요한 점도 있다. 아울러 세계와 우주를 보는 안목이 더 깊고 성숙해져야 하는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그들이 국정 현안을 풀어가는 데 있어서 나타나는 서투름를 지적하고 그와 함께 어떤 지혜로운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이라면 지극히 타당한 일이라 하겠다. 그러나 그들에 대한 어떤 구체적 문제는 전혀 적시하지 못하면서 막무가내로 주사파니 뭐니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민족문제에 있어서도 그의 시각이 대단히 협소하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북한 체제가 바람직한 것인지 아닌지를 판단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수령론과 군대 제일주의라는 낡은 가치관과 이론으로 자유를 억압하고 굶주린 탈북자들이 제 3국을 떠돌게 하는 것은 민족적 범죄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북한을 좋게 볼 수 있습니까. 낭만적 민족주의나 오도된 가치관을 바탕으로 한 민족공조는 자멸의 길로 빠질 겁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오늘날 북한이 안고 있는 장애현상에 대한 인식인 것만은 분명하다. 따라서 이와 관련된 그의 문제 제기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이를 어떻게 극복해야 올바른 것인지에 대해서는 매우 우려스러운 마음이 든다. 특별히 우리 정치권의 386 출신들을 지칭해 “낭만적 민족주의나 오도된 가치관을 바탕으로 한 민족공조”라고 한 점은 참으로 유감스럽지 않을 수 없다.

이는 햇볕정책을 전면 부인하고 있는 듯한 주장으로써 북한을 고립시켜야만 민족문제를 풀어 갈 수 있다는 전형적인 이분법적 인식을 그대로 바탕에 깔고 있다. 어떻게든 상대를 없애야만 문제 해결이 가능하다는 지극히 독재적인 발상에 다름 아니다. 그가 북한을 비판하면서 정작 그 자신도 다분히 폐쇄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통일을 이루어가는 과정에 있어서 북한의 경제적 자립을 도와야 함은 이제 상식으로 통하고 있다. 북한이 경제적으로 자립하지 않고서는 향후 통일이 된다 하여도 대단히 혼란스런 상황이 발생하게 되리란 점을 많은 사람이 우려하고 있는 실정이다. 굳이 통일 독일의 경우를 들지 않더라도 쉽게 파악되는 대목이다.

하물려 현재 남북한은 옛 동서독에 비해 턱없이 낮은 경제력이다. 이를 감안한다면 남북 경제협력은 더욱 강화되어야 하고 교류 또한 활발히 이뤄져야 한다. 이를 통해 서로가 자신감을 갖고 또 이해의 폭도 넓힐 수 있어야 한다. 민족 모두가 공히 번영을 구가함으로써 실제적으로 통일을 이룰 수 있는 첩경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그러나 그의 말 가운데 새겨 들어야 할 대목도 있다. 즉, “참여와 책임 공유를 통해 경제적으로 선진화하고 통일을 이룩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사회통합이 절실해요.”란 주장에 대해서는 깊이 공감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이에 대한 고민이 있어야 한다. 바로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열쇠가 그간 쌓여 온 구태를 벗겨내는 일로부터 시작될 수 있다. 또한 심각하게 양극화되고 있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타계해 나가는 일에 있음도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사회원로의 위치에 있는 사람으로서 계층과 세대간 그리고 남북간 사이에 괜한 갈등과 불안을 확대 유발시키는 언행은 삼가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오히려 기득권 세력의 철저한 자기 안주에 대해 쓴소리를 아끼지 말아야 할 때다. 아울러 참여정부의 우왕좌왕과 표리부동한 자세에 대해 시정을 촉구할 일이다. 속히 지성을 회복하고 자성의 계기로 삼기 바란다. 

시인 정성태 

2004년 12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