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태 [칼럼]

안빈낙도의 삶 실천한 마음의 스승 입적/정성태

시와 칼럼 2010. 3. 11. 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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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정스님 다비식 순천 송광사에서 13일 조촐히 엄수


안빈낙도의 삶을 몸소 실천했던 법정스님(속명 박재철)이 11일 길상사에서 입적했다. 3년 전부터 폐암으로 투병생활을 했던 법정스님은 1932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나 전남대 재학 중이던 1954년 통영 미래사에서 효봉스님을 만나 머리를 깎은 후 순천 송광사에 출가했다. 1975년 인혁당 사건 이후 송광사 뒷산 불일암 터에 토굴을 짓고 독거에 들어갔다. 이무렵 지은 저서가 지금까지도 꾸준히 사랑 받고 있는 ‘무소유’다. 1992년엔 강원도 화전민이 살던 산골 오두막으로 옮겨 홀로 수행하던 중, 고급 요정으로 사용되던 대원각을 무상으로 기부 받아 1997년에 길상사를 창건했다.


다수의 도서를 출간하기도 했던 법정스님은 ‘무소유’, ‘산에는 꽃이 피네’, ‘산방한담’, ‘텅빈 충만’, ‘물소리 바람소리’ 등과 같은 저술활동을 통해 피곤에 지친 현대인의 정신을 따뜻이 위로하고 또 생의 길잡이가 되는 혜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특별히 불교를 대중과 보다 친숙하고 이해하기 쉽게 접근시켰다는 점에 있어서는 그의 공헌이 실로 크게 평가되어야 할 측면이 강하다.


법정스님의 무소유에 대한 근본 철학이 무엇인지를 선명하게 깨달을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있다. 그는 “무소유는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라고 말함으로서, 부의 축적이 초래하게 되는 필연적인 죄과를 경계하고 있다. 그는 또 “우리가 선택한 맑은 가난은 부보다 훨씬 값지고 고귀한 것이다”라고 설파함으로서 ‘무소유’가 갖는 그의 정신세계의 지향점이 무엇인가를 명징하게 함축하고 있다.


수필집 ‘무소유’에서 “다음 생에도 다시 한반도에 태어나 출가수행자가 되고 싶다”고 했던 법정스님은, 입적하기 전날 밤 “모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린다. 내가 금생에 저지른 허물은 생사를 넘어 참회할 것이다. 내 것이라고 할 것이 남아 있다면 모두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데 써 달라. 이제 시간과 공간을 버려야겠다”는 말을 남겼다. 또한 “ 많은 사람에게 수고만 끼치는 일체의 장례의식을 행하지 말고, 관과 수의를 따로 마련하지 말며, 평소의 승복을 입은 상태로 다비하여 주고, 사리를 찾으려고 하지 말며 탑도 세우지 말라”고 당부했다.


탐욕이 가득한 시대에 마음의 스승으로 살다 간 법정스님의 다비식은 출가 본사인 전남 순천 송광사에서 엄수된다. 향년 78세다. 그의 평소 유지대로 특별한 추모행사는 없을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 가운데, 빈소가 마련된 서울 길상사와 순천 송광사 그리고 송광사 불일암 등에는 추모행렬이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다.

 

대학시절 존재의 근원적 물음 앞에 서게 된 청년 박재철. 그로부터 곧장 학업을 중단하고 구도의 길을 찾아 나선 채 일생을 흐트러지지 않은 모습으로 출가 수행의 길을 걷다 간 법정스님.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풀, 나무, 돌, 바람, 구름과 벗하며 그것들과 따뜻히 소통했던 자연주의자. 청빈의 삶을 다하며 무소유의 지행일치를 엄격히 실천한 우리시대의 선각자. 법정스님을 일러 어느 수식을 붙인다한들 결코 부족하지 않을 말이다.

 

그런 그도 입적 며칠 전, 고향 사찰에서 올라 온 스님을 통해 그곳의 봄소식과 함께 속히 훌훌 털고 회복하실 것을 기원하자 아무 말 없이 눈물을 보였다고 한다. 바로 이 대목에서 그가 말하던 무소유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무소유는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라는 그의 말이 그래서 더 큰 울림으로 다가선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시인 정성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