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태 [칼럼]

오해와 진실, 그 슬픈 이중주/정성태

시와 칼럼 2009. 9. 24.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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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이에 일게 되는 오해는 참으로 무서운 속성을 지니고 있다. 친구 사이에서도 그렇거니와 살을 섞고 사는 부부간에도 그렇다. 피를 나눈 부모 헝제간에도 사소한 오해가 발단이 되어 의절하는 경우도 생겨나게 된다.

 

오해에서 비롯된 인간관계의 파국은 기실 친한 사이에서 자주 발생하게 되는 측면이 강하다. 서로 잘 모르면 오히려 더 경계하고 주의를 기울이게 되는 데 반해, 오래되고 친한 사이가 될 수록 그 친밀함으로 인해 자칫 오해를 불러 일으킬만한 언행을 별 생각 없이 하게 된다.

 

경험의 법칙에서 보더라도 그렇다. 특별히 부부간 또는 연인간에는 더욱 그러한 요인을 많이 안고 있다. 내 남편 또는 내 부인이기 때문에 혹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스스럼없이 하게 된 말 실수가 원인이 돼 결국 가정을 깨트리거나 사랑하는 대상과의 관계를 냉전으로 이끌게 되는 경우까지 왕왕 발생한다.

 

부모 형제간에는 어떤 형태로든 또 다시 만나게 되고 그러다 시간이 흐르면 그 오해를 풀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그러나 부부 혹은 연인 사이에서는 상호간에 그 얄량한 자존심을 지킬려다 끝내 감정싸움으로 번지게 된다. 그리고 한 번 헤어지게 되면 그대로 파국을 맞는다. 남남이기 때문에 서로 만날 일도 없게 된다. 설혹 뒤늦게 진실을 알게 된다 하더라도 그 때는 이미 늦은 후다.

 

이렇듯 오해는 인간관계를 피폐하게 만드는 몹쓸 질병이다. 서로간의 그 오래됨이 갖는 친밀감으로 인해 다른 사람 입장에서 볼 때는 충분히 이해될 수 있고 또 아주 사소한 문제에 불과한 작은 불씨 하나가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 이면에는 사랑하는 마음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를 달리 뒤집어 보면 자기 안의 이기적 소유욕이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까닭이다. 그게 비록 사회생활의 연장선에서 이뤄지는 것이라 할지라도 다른 이성과의 식사마저도 용납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한 행위에 대해 꼴을 못 봐주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선인들은 오래 된 사이일수록 말조심할 것을 주문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사람 사는 동네에 있어서 말실수 또는 오해의 소지가 전혀 없을 수는 없다. 물론 주의하고 삼가할 일이지만 그러나 그게 어디 자기 마음에 딱 맞게 될 수야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오늘 날에는 전화는 기본이고 그 외에도 수많은 첨단 의사소통 기계가 널리 보급되어져 쉽고 간편하게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사람 사이의 의사 전달 과정에 있어서 근본적인 문제 해결은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서로 마주 앉아 상대의 눈빛과 표정을 보며 그 속내를 충분히 헤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화가 단절된 현대인의 삶은 그래서 고독하다. 수많은 다중과 대화를 갖게 되지만 그러나 진실이 결여돼 있기 때문에 오히려 대화가 조작되고 위장되게 된다. 그로 인해 끊임없이 스스로를 오해라는 올가미에 가두게 될 뿐만 아니라 원치 않는 고립감을 낳는다. 그리고 이는 결국 인간관계를 파국으로 이끌게 된다.

 

중요한 것은 상대가 처한 입장을 내가 먼저 이해하고 따뜻이 배려하는 자세 그리고 설혹 오해가 생겼다 하더라도, 내가 먼저 손 내미는 자세가 그 무엇보다 먼저 요구된다 하겠다. 아울러 나와 똑 같은 생각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지상에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말이다.

 

2005년 6월 22일

 

시인 정성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