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태 [칼럼]

역린을 꽤하는 자에겐 반드시 죽음이 따르리니/정성태

시와 칼럼 2006. 11. 3.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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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은 말이 없되 끊임없이 도도한 자태로 일체를 흘러 보낸다.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은 채 스스로를 비우고 또 비우건만 그러나 기묘하게도 늘 충만함으로 자신의 근원을 지키며 제 갈 길을 간다.

만상은 그리 지나가는 강물이다. 제 아무리 한 시대를 풍미한 영웅호걸이라 할지라도, 결국은 되돌릴 수 없는 세월의 뒤안길에 묻혀, 흐르고 또 흘러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빈 자리엔 다시금 새로운 것들로 가득 채워지는 순환의 법칙이 인간사의 순명과 같은 이치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의 도도한 흐름을 거부하게 되면, 그곳엔 소용돌이가 일고 상흔이 남는다. 그럼에도 이 당연한 순리를 거부한 채, 역린을 꽤하면 꽤할수록 부침은 크게 일게 되는 것이며, 그에 따른 괴리는 씻을 수 없는 참혹한 결과로 나타나게 된다.

작금 정치권 사정이 정계개편 논의로 시끌벅적하다. 그런데 참으로 해괴망측한 일은, 도무지 염치란 것을 모르는 사람이 적잖이 있다는 사실이다. 나라 말아먹은 것은 기본이요, 거기에 별의별 명목의 가렴주구를 통해 서민의 눈물어린 쌈짓돈을 착취한 그들이 또 무슨 권력에 대한 뻔뻔함이 남아 있다고 감히 서민대중과 정체성을 입에 담으며 귀 따가운 나발을 불어대는지 모를 일이다.

적어도 책임 있는 정치인이라면, 물러 설 때를 알아야 한다. 국민의 삶을 도탄에 빠트린 데 대한 일말의 양심이라도 남아 있는 자들이라면, 스스로 장강에 몸을 던져 조용히 정치적 최후를 맞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국가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며, 더 나아가 역사에 대한 상흔을 한 치라도 줄이는 길이다.

그런데도 이의 단순한 이치조차 깨닫지 못한 채, 향후 전개될 정계개편에 있어서 무슨 주도권을 쥐어보겠다는 속셈인지, 아무래도 그 낯짝에 철판 용접을 한 모양이다. 가슴을 찢으며 참회해도 용서받기 어려운 판국에 어디 그리 함부로 천방지축 날 뛸 수 있더란 말인가. 참으로 무도하고 가당치 않은 행태를 일삼고 있으니 차마 하늘 부끄러워 도리어 말문이 막힌다.

그렇다하여 어디 순백의 영혼이 있으랴만, 그러나 독초는 반드시 가려내야 하는 법이다. 농부가 땡볕을 마다 않고 논에 나서는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솎아낼 것을 솎아낼 때, 그만큼 전체 조직의 건강을 담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 지금 우리 시대의 고민이 담겨 있어야 한다. 어떻게 가는 길이 정도이고, 또 보다 원활한 유기적 연대를 통해 거룩한 힘을 형성할 수 있는 지를 지혜롭게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오늘도 장강은 말없이 흐른다. 비워내고 또 비워내도 언제나 가득 채워져 흐르는 그 생성의 이치. 그렇듯 인재는 언제나 솟아나고 있기 마련이다. 이를 깨달을 수 있다면 어리석게도 숫자놀음에 연연해 할 상황은 아니다. 오히려 단호히 외칠 일이다. 쭉정이는 쭉정이일 뿐 결단코 벼는 아닌 것이며, 역린을 꽤하는 자에겐 반드시 죽음이 임하리란 것을.


시인 정성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