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자 상징과 같다. 국민은 자신의 한 표가 정확하게 기록되고, 공정하게 집계되며, 어떠한 의심도 없이 결과가 확정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투표장에 나간다. 그 믿음을 충족시키는 것이 선관위의 존재 이유다. 그러나 최근 잇따라 제기된 선거관리위원회의 실시간 투표율 관리 의혹은 ‘과연 선관위를 믿을 수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민주주의는 한 장의 투표용지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단순히 투표를 실시하고 당선자를 결정하는 데 있지 않다. 국민이 선거 과정을 신뢰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살아 숨 쉰다. 따라서 선관위는 어느 국가기관보다 엄격한 책임감과 도덕성을 갖춰야 한다. 선거를 관리하는 기관이 국민의 신뢰를 잃는 순간, 민주주의 근간도 함께 흔들리기 때문이다.
현재 검·경 합동수사본부는 일부 선관위 직원이 실시간 투표자 수를 임의로 수정한 정황을 포착해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이는 단순한 입력 실수나 행정 착오로 치부할 문제가 아닌 듯싶다. 국민 주권을 관리하는 기관이 스스로 공적 기록의 신뢰를 훼손한 중대한 사안이며, 선거관리기관의 존재 이유 자체와 대한민국 선거제도의 근간을 뒤흔드는 사건이다.
더욱 충격적인 점은 선관위 일부 관계자들이 내뱉은 “최종 투표율만 맞으면 되는 것 아니냐" 또는 “중간 투표율은 서비스일 뿐"이라는 취지의 발언이다. 참으로 경악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는 단순 실수가 아니라 선거 절차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왜곡한 것이다. 선거관리기관으로서 마땅히 갖춰야 할 책임감과 공적 기록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안이하고 허술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아울러 이러한 행태가 일부 개인의 일탈인지, 또는 조직 내부에 뿌리내린 관행인지의 여부다. 만약 오류를 은폐하기 위해 임의로 수정이 반복되어 왔다면 이는 조직 전체의 윤리와 통제 시스템이 완전히 무너졌음을 의미한다. 규정보다 관행이 앞서고, 책임보다 편의가 우선하는 순간 공공기관은 국민을 위한 기관이 아니라 스스로를 절대화하는 위험한 조직으로 변질된다.
그동안 선관위는 "전산 조작은 불가능하다"고 국민 앞에서 수차례 강조해 왔다. 그렇기에 이번 의혹은 더욱 심각하다. 설혹 최종 개표 결과와는 별개의 문제라고 하더라도, 선거 과정에서 공개되는 공식 데이터가 오염됐다면 국민은 다른 선거 절차 역시 의심하게 된다. 민주주의는 결과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절차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는 순간 민주주의도 크게 위협받는다.
특히 선관위는 독립성을 강조해 왔다. 하지만 독립성은 견제 받지 않는 특권이 아니다. 국민으로부터 독립성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누구보다 높은 수준의 투명성과 책임성을 보여야 한다. 선관위를 믿으라고 윽박지를 것이 아니라, 선관위 스스로 신뢰받을 수 있도록 실천하는 일이 우선이다. 신뢰는 선언과 강요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증명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재명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은 이번 사안에 대해 정치적 유불리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의혹에 대한 성역 없는 수사를 통해 사실관계를 낱낱이 밝혀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객관적인 증거를 통해 위법 행위가 확인된다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엄중한 사법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 동시에 선거관리 시스템 전반에 대한 대대적인 혁신을 통해 국민적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 급선무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모든 전산 수정 이력이 삭제 불가능한 전자 기록으로 자동 저장되고, 투표 관련 수치 변경은 다중 승인 절차를 의무화해야 한다. 외부 전문가가 참여하는 상시 감사 체계를 구축하고, 선거 종료 후에는 수정 기록과 사유를 공개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내부고발인 보호 제도를 강화하고, 독립기관이라는 이유로 외부 검증을 피하는 시대도 끝내야 한다.
세계 어느 나라도 완벽한 기관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에 대해 책임지는 자세는 중요하다. 지금 선관위에 필요한 것은 해명도 변명도 아니다. 국민 앞에 모든 사실을 투명하게 사죄하고, 철저한 수사를 통한 의혹 해소다. 또한 선관위 직원들에 대한 윤리 및 책임교육의 대폭 강화 등을 통해 다시는 같은 논란이 반복되지 않도록 혁신하는 길이다.
민주주의는 결과보다 과정이며, 그러한 신뢰 위에 세워진다. 국민이 선거를 믿지 못하는 순간 민주주의 토대도 위태롭게 흔들린다. 선거를 관리하는 기관이 절차적 엄정함을 무너뜨린다면, 국민의 고혈을 흡혈하는 해로운 집단으로 인식될 따름이다. 이제라도 국민적 신뢰를 회복하고,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든든한 기관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행동으로 증명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 필자 : 정성태(시인/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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