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공합작,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이 결탁해 일본군 토벌을 목적으로 맺은 협정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미국-소련 등이 연합해 일본-독일 등 전범국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다.
그것은 이념적 연대가 아닌, 침략자에 대한 응징의 성격을 지닌다. 오늘날 국제관계도 언칭 이념적 연대인 듯싶으나, 그 속살은 철저히 자국 이익에 맞닿아 있다. 신냉전의 이익화인 셈이다.
베트남 내전에 참전하기도 했던 한국이 지금은 사회주의 국가인 그들과 활발한 경제교역에 있다. 심지어 방산 부문마저 베트남 현지 기업들과 협력 관계 구축에 나선 상황이다.
인도는 지역에 따라 공산당이 장악한 경우도 있다. 그런 그들이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과 대척점에 섰다. 반면 우리 기업들은 차츰 인도 시장을 잠식하고 있으며, 방산무기까지 수출한다.
이종섭 국방부 장관이 난데없이 육사에 세워진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방침을 밝혔다. 소련 공산당 전력 때문이란다. 그 대신 독립군 토벌 전력의 백선엽 장군을 들일 것으로 알려진다.
여기서 우리는 심각한 물음 앞에 직면하게 된다. 육군사관학교 뿌리를 독립군에서 찾을 것인지, 또는 일제가 세운 만주군관학교에서 찾을 것인지 적잖이 당혹스럽지 않을 수 없다.
전제한 바와 같이 제2차 세계대전은 미국-소련 등 연합국과 독일-일본 등 전범국과의 대결이었다. 당시 한국사회 지배 이데올로기는 민족독립과 친일매국의 대립적 성격이 강했다.
일각에서 홍범도 장군을 폄훼하기 위해 1921년 6월 소련에서 발생한 자유시(스보보드니) 참변을 왜곡하는 경우도 있다. 흑하사변으로도 불리며, 지금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도 크다.
익히 알려진대로 1920년 독립군은 삼둔자전투, 봉오동전투, 청산리전투 등에서 일본군에게 대승을 거둔다. 이에 일본군은 만주의 한국독립군을 토벌하려는 대규모 작전에 나선다.
그러자 열세에 놓인 독립군 일부가 밀산(密山)에 모여 세력을 통합하고 대한독립군단으로 재편성된다. 그런 후 연해주로 들어갔으나, 통수권을 둘러싼 내부 분열이 빈번했다.
세력을 키우며 군비 확장의 기회가 왔으나 사정이 다른 여러 부대의 집결은 주도권 싸움으로 이어졌다. 군권장악을 위한 암투가 벌어진 것이다. 이로인해 '고려혁명군정의회'가 생겨난다.
당시 군정의회는 병력 측면에서 열세였다. 때문에 권한은 있으나, 영향력은 크지 않았다. 이후 합동민족군, 홍범도 병력, 코카서스 기병까지 합류하며 군정의회가 우세를 점하게 된다.
그렇듯 연해주로 독립군이 대거 몰려들자,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은 이를 정치적 이민자로 규정하고 1921년 1월 모든 한인 부대의 무장해제를 요구한다. 다분히 위협을 느낀 측면도 있다.
이를 따르지 않을 경우 무력 수단도 동원 가능하다는 강경 입장이었다. 반면 응할 경우, 이민자의 권리에 따라 자신이 정한 거주 장소로 이동시키기 위한 차량이나 마차 제공을 약속한다.
그렇게 2개월 이상 실랑이를 벌이게 된다. 그러다 김좌진, 이범석 부대 등은 다시 만주로 향했다. 이때 돌아가지 않은 독립군은 자유시로 이동한 후 양도했던 무기를 돌려받는다.
1921년 1~3월 사이에 자유시에 도착한 여러 독립군부대와 뒤늦게 홍범도, 지청천 부대도 합류한다. 이때 극동공화국 지원을 받아 대한의용군 총사령부가 결성된다.
그런데 문제에 봉착한다. 각기 다른 독립군 부대가 자신들 장교에게만 지휘받기를 원하고 다른 부대 장교는 따르지 않았다. 당연히 부대 사이의 갈등이 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1921년 1월 설치된 코민테른 극동비서부가 4월부로 동방정책 결정권을 극동공화국으로부터 이양받는다. 이러한 변화로 인해 상황은 더욱 극심한 혼란에 빠진다.
갈등의 소지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사할린 부대가 현지 식량 조달을 위해 극동공화국 농민들 식량을 강제로 징발한 것이다. 또한 수시로 폭력과 약탈을 일삼는 패악을 저지른다.
이로 인해 현지 극동공화국 농민들은 자신들을 괴롭히는 무장 독립군에게 분노하게 된다. 급기야 독립군과 현지 농민들 사이에 무장충돌 직전까지 치닫는다.
특히 사할린부대 중심인 니콜라옙스크 부대는 1919-1920년에 이미 사할린 민간인 대량 학살과 폭력으로 악명 높았다. 무력을 통해 물자를 공급하고 사적 갈등까지 힘으로 해결했다.
이에 1920년 7월, 인민혁명군 총사령관은 직무상 범죄자 정리를 명했으나 효과를 보지 못한다. 무장 독립군을 통제하려는 소련 공산당과 군부 시도가 실패로 돌아갔던 것이다.
그런 한편 일본과 소련은 캄차카반도 연안의 어업조약을 북경에서 체결한다. 이 때 일본은 자신들에게 위협적인 소련 영토 내의 한인혁명단체 육성 취소를 강하게 요구한다.
당시 소련은 1917년 10월 혁명 이후 국력이 쇠약해진 상태였다. 그 때문에 일본과의 불화가 이롭지 못하다는 판단에 따라, 1921년 6월 독립군의 무조건 무장해제 통지를 내린다.
이를 완강히 반대하는 사할린부대(대한의용군)에 군정의회는 무장해제 강제를 결정한다. 27일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이 진압 감행에 나서는데, 이날 전사자 기록은 자료마다 차이가 난다.
의용군 측 사망자가 최소 36명에서 최대 수백명에 달하는 것으로 나온다. 정확한 장소는 자유시 인근 수라젭카로, 사할린부대가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에 의해 강제로 무장해제된 사건이다.
이날 피해 당사자인 계봉우 회고록 [조선역사]에 따르면 사망자가 36명인 것으로 나온다. 물론 여기에는 실종자 등 정확히 파악할 수 없는 경우도 있기에, 희생자 숫자가 부정확할 수도 있다.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 정보에는 한인 36명 사망, 익사 60명, 실종 60명, 무장해제 860명으로 나온다. 실종자는 대부분 만주로 도주해 그곳에서 유격대원으로 활동한 것으로 알려진다.
혹자는 이를 두고 일본과 거래한 레닌 정부의 음모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모든 것을 정리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물론 하나의 현상으로 설명될 수는 있다.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 어느 지휘관은 1921년 4월 "농민과 한인 사이 전면적 충돌이 발생할 수 있을 정도로 관계 악화", 5월 들어 다른 지휘관은 "사할린부대가 복종하지 않는다"고 보고한다.
이미 사할린부대는 양민 집단학살로 악명 높았다. 그런지라 조선혁명군의 성공적 단합을 위해 “가장 야비한 적들을 쓸어버려야 한다”고 했을 정도다. 총사령관도 “숙청은 진행될 것이다"고 밝혔다.
사할린부대의 만행 뿐만 아니라 자유대대로의 통합 지침까지 무시한 채 계속 돌출적이었다. 이는 현지 극동공화국 입장에서는 농민들 뿐만 아니라, 군부 또한 매우 불편한 일이었다.
무장단체인 것만으로도 남의 나라 입장에서 볼 때는 위험한 집단인데, 더욱이 현지 통제까지 무시했으니 골칫거리가 된 셈이다. 이를 자유시 참변의 결정적 단서로 보는 것이 보다 적합할 듯싶다.
당시 김좌진 등 연해주에서 돌아간 부대들은 애초 자유시에 없었다. 홍범도, 지청천 부대 등 대다수는 자유대대에 합류한 뒤였다. 무장해제 과정에서 사망한 사람 대부분은 사할린부대였다.
여기서 언급된 사할린부대 또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대와는 전혀 무관하다. 임시정부 명의로 설립, 운영된 군대는 그로부터 약 20년 후 창설된 광복군이고, 그 당시 광복군은 없었다.
그런데 진압하는 측에서 많은 사상자를 내고 싶은 생각은 없었던 듯싶다. 사할린부대 또한 적극적인 무력대응에 나서지 않았다. 수십명 사상자 발생도 언어소통 미흡이 주요 이유로 거론된다.
김재규 진술에서도 그 맥락을 읽을 수 있다. 그는 “왜 기관총 사격을 하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을 받자, 숨겨두었던 기관총 열쇠 4개를 말없이 내어놓았다. 이로인해 곧장 석방되기도 했다.
군정의회 또한 입장이 다르지 않았다. 살상을 통해 무장해제를 하려고 하지 않았던 흔적이 역력하다. 희생자 발생은 대부분 자유시 수비대 병력들이 수행한 작전지역에서 발생했다.
이후 대한의용군(사할린부대) 소속 900여명 포로에 대한 군사재판이 열렸다. 홍범도 장군도 재판위원으로 참여한다. 어쩌면 이르쿠츠크파가 얼굴마담 정도로 내세웠을 수도 있다.
그러나 스스로 자청해서 재판관으로 참석했다는 점이다. 어떻게든 포로들을 석방시키려는 의도에서였다. 그에 힘입어 결국 소수 인원만 감옥에 갇히고 나머지는 모두 석방됐다.
흥미로운 사실은, 홍범도 장군이 1922년 개최된 극동민족대회에서 이르쿠츠크파를 살인자라고 비난한데 있다. 또한 상해파 규탄 성명서에 자신의 동의없이 이름을 넣었다는 폭로다.
"이제야 노농정부와 약정하여 군수 충분하고, 무기탄약은 제한없이 무료로 공급받을 것"이며 "와신상담 산야에 전전한 목우즐풍 영일없이 상하 서로 피를 철하고 맹약한 바를 지켜야 할 것이다"
이는 참변 발생 6개월 전인 1920년 12월, 김좌진-홍범도 장군이 발표한 내용이다. 소련이 한인 독립운동을 민족해방운동으로 약속한 것을 믿고 크게 기대했음을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다.
무장부대 통합 명분, 코민테른 권위 인정, 무기 및 식량의 원활한 공급 등 현실적 고려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때문에 자유시로 이동한 홍범도 장군 부대가 군정의회 주도권을 인정했던 듯싶다.
그러나 한계가 존재한다. 한인들로서는 민족해방운동이, 곧 한국의 독립을 위한 운동이었다. 그러나 소련으로서는 한인사회에 사회주의 유포와 계급투쟁을 조장하려는 것이었다.
경계해야 할 점은, 자유시 참변에 홍범도 장군이 직접 개입했다는 악의적 여론 조장이다. 당일 그는 이르쿠츠크로 회의 참석을 위해 떠났는데 그날 사태가 일어났다.
이를 전해듣고 휘하 장교들과 함께 황급히 현장을 뛰어다니며 시신을 땅에 묻고 정리하기에 분주했다. 다들 솔밭에 모여 땅을 치며 통곡하기도 했다. 독립운동사 최대 비극이 아닐 수 없다.
* 필자 : 정성태(시인 /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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