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태 [칼럼]

무능하고 무책임한 정치, 고통은 국민 몫인가?/정성태

시와 칼럼 2019. 11. 8.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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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에 깊숙이 드리운 치명적 난제 앞에 직면해 있다. 슬픔의 시효를 멀찍이 조롱하듯 연이어 발생하고 있는 일가족 자살 사태는 충격 이면의 분노에 맞닿아 있다. 삶의 심층적 고통을 더 이상 대면할 수 없었던 마지막 저항일 듯싶다. 풍요로 치장된 허울로부터 실오라기 하나없이 발가벗겨진 우리사회의 낯뜨거운 맨살에 다름 아니다.

 

정치가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딘지 원초적 물음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국가권력이 시스템을 통한 불평등과 불공정 문제를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그로인해 날로 벌어지는 격차사회는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최소한의 존엄마저 가차없이 짓밟고 무너뜨리는 지경에 처했다.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은 사회로 전락된 것이다.

 

천부인권이라 할 수 있는 자유, 공정, 평등의 가치가 수렁에 쳐박혔다. 힘들게 노동을 해도 가난을 벗어날 길 없는 저임금 노동자 문제는 우울하다. 그마저 일자리가 없거나 또는 더 나은 삶을 위해 창업하는 소상공인 태반이 적자에 허덕인다. 그러다 자칫 빈곤층으로 내몰리거나 또는 극단으로 치닫는다. 그들에게 어찌 게으름을 물을 수 있단 말인가?

 

경제대국을 자랑하면서도 국민 대다수는 가난에 지쳐 있다. 경제적 문제로 결혼을 포기하고, 설혹 결혼한 이들조차 임신과 출산 그리고 보육 및 교육에 대한 감당키 어려운 부담 때문에 아이 갖기를 회피한다. 우리사회 전반에 내재된 구조적 결함과 허약성을 그대로 웅변하고 있다. 바로 정치 실종의 적나라한 현주소다. 무엇을 위한 정치인지 정조준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른바 조국 사태를 통해 드러났듯, 혹은 나경원 관련 의혹 등에서 스멀거리듯, 특권층 일탈에는 좌우가 따로 구분되지 않고 있다. 거기 중우정치에 깊이 매몰된 좀비들의 수준 낮은 광란질주만 어지럽게 충돌하는 형국이다. 선동과 구호만 난무하는 그들만의 졸렬함 뒤엔 국민적 참상이 머문다. 분칠이 지워지며 대면하는 일그러진 민낯이 아닐 수 없다.

 

호불호를 떠나 이제 4차 산업혁명은 피할 수 없게 됐다. 그로인한 노동의 종말도 예고돼 있다. 이미 노동자가 사라진 공장, 무인화 기기, 로봇이 커피를 내리고 또 식탁까지 서비스한다. 향후 더욱 폭넓은 영역으로 급속히 확대될 듯싶다. 그에 비례해 인간의 노동이 설 자리를 잃게 될 것임도 자명하다. 일터를 뺏긴 노동자들 삶의 문제가 대두된다.

 

어떻게 할 것인가? 물론 새로운 일자리가 창출될 수 있을 것이나, 문제는 사라지는 일자리에 비해 턱없이 부족할 것이라는 점이다. 현재의 취약한 사회 안전망 또는 복지 시스템으로는 역부족일 수밖에 없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기대를 걸지만 그러나 예외없이 실망으로 막을 내린다. 오히려 매번 악화되는 현실을 살고 있다.

 

재벌들의 사내 유보금은 매년 쌓여가고,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 연봉도 남부럽지 않다. 반면 하청업체인 중소기업은 경영의 애로를 호소한다. 노동자들 임금 또한 대기업의 절반 수준에 머문다. 국가 예산 규모도 해마다 늘어난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가계대출은 나날이 악화되고 복지 사각지대는 여전하다. 과감한 구조 혁신이 요구되는 지점이다.

 

나라에 돈이 없어서 어려움이 가중되는 게 아니다. 정치권력의 냉담한 외면에서 기인한다. 예산 사용의 투명성만 제고돼도 10년 내로 집없는 모든 가구에게 주택을 무상 보급할 수 있을 것으로 추론된다. 세제혁신 통한 복지확충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관건은 정치권, 특히 집권세력의 의지와 결단에 관한 문제다. 선량한 국민을 더는 죽이지 말라.

 

시인 정성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