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권의 무지ㆍ무능ㆍ무대책 그리고 독선과 아집에서 기인하는 맹목성이 실로 파렴치하다. 심지어 살기까지 느껴진다. 이런 상황에서는 국가적 미래를 담보하기가 사실상 난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피를 부르는 혁명적 수단이 강구되지 않고서는 헤쳐나오기 어렵겠다는 자조 섞인 말까지 터져나오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를 갈아엎어야 하는데, 또 다른 장애 요인은 야당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국가권력이 선량한 국민을 향해 겁박을 일삼고 있는데도 그저 강 건너 불구경하듯 태연하기 이를데 없다. 이는 야권 최대 계파 수장인 더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의 기만성에서 크게 기인하고 있다.
단언하건데 박근혜 정권과 새누리당은 변하지 않을 집단이다. 자신들 안위만 보장 받을 수 있다면 미국 또는 일본의 속국도 마다하지 않을 것으로 여겨지는 간악한 무리다. 그렇다면 이를 타개할 시대적 책무가 야권에 부여되어 있다. 그러나 야권의 현실은 고작 현실 안주에 머물러 있다. 특히 문재인 전 대표를 축으로 하는 소위 친문세력의 표리부동이 그것이다.
사정이 이런데도 정치권 일각에서 중도통합론을 흘리며 호객행위를 일삼는 자들이 있다. 기실 그 내막을 들여다보면, 또 다른 기득권의 연장에 불과하다. 중도는 정치인 자신들의 사적 이해관계일 뿐 결코 현상에 대한 옳고 그름에 대한 변별력이 될 수는 없다. 이를 우리는 사이비라 일컫는다.
그러한 친문세력의 무기력 혹은 나태함과 맞물려 야권에 만연하고 있는 회색주의를 경계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은 도상에서 강도 만난 자에게, 그 강도를 때려잡을 수 있는 용기 있는 지도자가 필요하다. 강도가 무섭다며 숨는 자는 결국 강도편에 다름 아니다. 온갖 형태의 회색주의자, 혹은 어용 및 사이비는 야권 내부의 간자에 불과할 따름이다.
지금 야권에 시급히 요구되는 것은, 결코 방관자적 자세가 아니다. 국가와 민족의 오늘과 내일 그리고 민중의 시린 삶을 붙잡고 애곡해 하는 것이다. 아울러 그것의 올바른 방향성을 위해 헌신의 자세로 투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역사의 물꼬가 바르게 열리고, 거기 영예와 구원도 따르게 된다.
시인 정성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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