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태 [칼럼]

혜민스님, 그의 요설에 대해/정성태

시와 칼럼 2015. 1. 5.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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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가 잘못되면 잘못될수록, 그에 비례해 국가 전체가 극심한 고통을 겪게 된다. 특히 상대적으로 약한 사람들이 감내해야 하는 슬픔의 질량은 상상 이상일 수 있다. 혹한의 추위를 뚫고 하루 온종일 파지를 주워 팔아도 한겨울 난방은 고사하고 하루 세 끼 일용할 양식마저 충족하기에 버거운 실정이다. 정치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렇다, 입 다물고 있으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 되고, 또 그들과 종범 관계에 놓이게 되는 까닭이다.

 

OECD 국가 가운데 노인 자살률과 빈곤률이 세계 1위라는 수치스런 기록은 주지하는 바와 같다. 부패지수 또한 같은 아시아권인 싱가포르, 일본, 홍콩, 대만에 비해 한없이 부끄러운 실정이다. 심지어 중국, 필리핀과 엇비슷한 실정이니 더 말해 무엇하랴. 이명박 정권에서는 언론자유국 지위마저 상실됐다. 박근혜 정권 들어서는 오히려 더 심화되고 있는 형편이다. 양극화 또한 날로 깊어지고 있으니 정치 무용론이 나올만도 하다.

 

정초 들어 혜민이라는 중이 요설을 내뱉었다. 즉, “자기 삶의 내용이 알차고 풍요롭지 못하면 정치 이야기나 연예인 이야기밖에 할 이야기가 없게 된다”라는 내용이다. 평소 그의 가볍게 팔랑거리는 감성 긁기, 그리고 그에 쉽게 놀아나는 일단의 사람들을 보면서 몹시 불편하고 또 우려스런 입장을 견지했다. 따라서 그의 탈정치를 가장한 불순한 의도의 정치적 발언에 대해 그리 새삼스럽지 않게 여긴다.

 

물론 인간의 감성을 향한 공감과 소통의 치유라는 측면을 결코 도외시하지 않는다. 아울러 그것 자체를 폄하할 의도 또한 전혀 없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에도 거기 깃든 사유의 폭과 깊이가 없다면 그야말로 하찮은 싸구려일 뿐이다. 듣는 이에 따라서는 한낱 소음이요 또 공해에 다름 아니다. 달린 입이라고 그리고 대중 사이에 이름 좀 팔렸다고 함부로 설레발 떨며 깃털 날릴 일이 아니다.

 

정치가 있는 듯, 없는 듯, 그래서 국민 일반이 굳이 정치를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 나라를 구현해야 함이 마땅하다. 정치가 그 있어야 할 본연의 자리를 찾아서, 그래서 정치판 특히 집권세력에 대한 국민적 원성이 없어도 되어야 함에는 이론이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정치권력에 대한 감시와 견제는 항시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그것을 위한 시스템 또한 철저하게 구축되어져야 한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기에 그렇다.

 

인간이 법 또는 사회적 규범 혹은 도덕이란 이름 아래 규율되고, 그에 따라 질서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집단이다. 먹고 마시며 자고 입는 등의 지극히 일상적인 것마저 정치적 간섭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그것들을 생산하는 최종 집합체가 바로 정치이기 때문이다. 혜민이라는 중의 발언이 그래서 무지하게 들리는 것이다. 아니 그 숨은 정치적 의도가 혐오스럽게까지 읽히게 된다. 중생의 피눈물에 함께 눈물 흘릴 줄 아는 중이 돼야 할 일이다.

 

시인 정성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