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태 [칼럼]

국민의 호곡소리에 수수방관한 정부/정성태

시와 칼럼 2013. 3. 3. 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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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랍되었던 김선일 씨가 끝내 변을 당했다. 이틀 전, 극한 공포에 휩싸인 채 “나는 살고 싶다”란 TV 화면 속에 비친 그의 절규가 살아 있는 사람에 대한 죄책감으로 강하게 다가온다. 머나먼 이국땅에서 국가와 동족을 원망하며 죽어 갔을 그를 생각하니 차마 숨이 막혀 한동안 말문을 열지 못 할 지경이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그 가족에게 위로가 될 수 있을지 참으로 치솟는 분노를 달리 주체할 길이 없다. 그러나 어찌 이 고통스런 현실을 그의 가족 문제만으로 한정지어 애써 덮어 둘 수 있겠는가. 이는 대한민국 전체 국민의 뼈를 깎는 자성이 되어야 하는 것이며 아울러 평화와 정의를 사랑하는 세계 인류의 공통된 슬픔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김선일 씨 피랍 사건이 알려진 다음 날(22일) 국가안전보장회의(NSC)와 열린당과의 간담회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날 있었던 NSC의 주된 보고 내용은 김선일 씨의 조속한 석방을 위해 노력할 것이지만 그러나 김선일 씨를 억류하고 있는 현지 무장세력과의 접촉이 어려운 실정이란 것이다. 아울러 김선일 씨가 이라크 무장 세력에 의해 살해 당할 경우 그에 따른 정부 보상대책과 시신운송 방안이 주요 보고 내용이었다고 한다. 이를 통해 보면 그의 죽음은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 아닌 것이란 생각이 강하게 든다. 국민의 안위를 염려해야 할 정부 당국이 김선일 씨가 사망하게 되리란 것을 기정 사실화하고 있다란 측면에서 이 땅에 사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끓어 오르는 원통함과 참담한 마음 가눌 길이 없다.

이는 다음 사실을 통해 더욱 극명해진다. 현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프리랜서 PD인 김영미 씨에 의하면 김선일 씨 피랍은 정부가 인지한 6월 21일보다 훨씬 전인 5월 31일에 이뤄졌다고 타전하고 있다. 그 근거로 김선일 씨가 실종된 날이 5월 31일이고, 그 날 이후로 김선일 씨를 본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김영미 씨는 전하고 있다. 아울러 이라크 주재 임홍재 한국대사 역시 이 부분에 대해서 어떤 명확한 입장 표명을 하지 않고 있다고 전하고 있다. 이는 김선일 씨와 가나무역 사장을 잘 아는 바그다드 현지 교민이 KBS 취재팀에 밝힌 내용에서도 여실히 입증되고 있다. 현지 교민에 따르면 김선일 씨로부터 모든 연락이 끊긴 날은 지난 달 31일이라고 KBS는 보도하고 있다. 또한 실제로 납치 사실이 방송되기 전에 이미 현지 공관도 알고 있었던 것으로 KBS는 보도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명확히 알 수 있는 것은 김선일 씨의 구출에 대한 정부 당국의 늑장 대응 또는 안이한 자세란 것이다. 이에 대해서도 KBS는 믿을만한 보도를 내고 있다. KBS 보도에 따르면 김선일 씨가 5월 31일 납치된 이후 단순 강도로 생각해 현지 가나무역 사장을 비롯한 민간인들이 자체 구출 노력을 했다고 밝히고 있다. 더불어 처음 협상과정에서는 분위기가 좋았지만 납치 무장세력에 대한 미군의 공격이 시작되고 이어 한국 정부의 추가파병 소식이 전해지면서 분위기가 급변한 것 같다고 밝히고 있다.

만일 김영미 프리랜서 PD의 증언과 KBS의 보도가 사실이라면 이는 정부의 김선일 씨에 대한 살해 방관에 해당되는 것이다. 김선일 씨를 납치한 것으로 알려진 ‘알 타우히드 알 지하드(유일신과 성전)’는 이라크 내의 종교적 광신도 단체나 단순 폭력단체가 아닌 외부로부터 유입된 정치테러 단체인 것이 분명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들은 김선일 씨 피랍 이후 한국 정부의 유연한 정치적 입장을 기대했지만 그러나 한국 정부의 추가파병에 대한 입장 불가라는 강경한 자세가 전해지면서 피랍 김선일 씨에 대한 살해라는 극단적인 행동을 취한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무장세력들이 당초 제시한 24시간의 협상 시한에서 12시간 가량이 더 지난 36시간이 되는 시점에서 김선일 씨가 살해됐다는 점은 이를 잘 입증하고 있다. 한국 정부가 시간을 더 달라는 데 대한 일종의 기대감을 현지 무장세력들이 갖고 있었던 것으로 추론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한국 정부의 추가파병에 대한 강경방침이 '알 자지라 방송'을 타고 보도되면서 끝내 젊은 목숨이 사지를 향해 돌아 올 수 없는 길을 나섰다. 사막의 황량한 모래바람과 함께 그는 영영히 우리와는 다른 길을 떠난 것이다.

이제 정부 당국은 분명히 밝혀야 한다. 무엇이 김선일 씨를 사막의 주검으로 몰아 넣을 만큼 서둘러 추가파병 방침을 공고히 재확인해 주었는지 이에 대해 정직히 답해야 한다. 도대체 무엇이 얼마나 급해, 한 사람의 무고한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 추가파병 강행 입장을 고수한 것인지 명확한 설명이 있어야 한다. 국민의 목숨과 안위는 뒷전으로 내팽겨쳐 둔 채, 미국의 야만적인 침략전쟁에 들러리를 서게 한 명분이 무엇인지 납득할만한 해명이 따라야 할 것이다. 김선일 씨의 사망은 결국 정부 당국의 수수방관에 의한 고의적 살해 행위임을 분명히 지적하며 이에 대한 정부 당국의 명명백백한 진실 규명을 촉구하는 바다. 

2004년 6월 24일

 

시인 정성태

 

* 오래 전에 작성된 글입니다만, 다시금 생각해보고자 꺼내 놓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