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일본이 1965년 6월 22일 도쿄에서 한일기본조약(한일협정)을 체결한다. 양국의 국교관계를 규정한 것으로 같은해 12월 18일 성립돼 발효된다. 수석전권대표로 한국은 이동원 외무부장관, 일본에선 시나 에쓰사부로 외상이었다. 한일회담 수석대표로는 한국 김동조, 일본 다카스키 신이치가 나섰다.
주요 내용 가운데 특히 눈길을 끄는 조항이 있다. 제2조에 나오는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일본제국 간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고 명시된 점이다. 아울러 "양국의 해석이 다를 경우 영문본에 의한다"는 부칙이다.
여기서 제2조에 삽입된 "이미"라는 부사를 두고 일본이 억지를 부린다. 우리 원안에는 없었으나, 일본이 요구해 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를 두고 한국은 한일병탄 자체가 불법이기에, 원천무효로 여긴다. 반면 일본은 병합조약은 합법이었으나 해방을 기점으로 무효라고 강변한다. 우리와 일본의 입장이 확연히 갈린다.
한편 한일협정에 따라 이듬해부터 10년에 걸쳐 5억 달러의 대일 청구권 자금이 도입된다. 한국 경제발전에 일정 측면 기여한 바 있다는 평가도 따른다. 하지만 한국의 지나친 양보로 인해 일제 강점기 당시 발생한 강제징용 피해자와 일본군 위안부 배상 문제 등 지금까지 갈등을 빚는 원인이 되고 있다.
특히 동남아 피해 국가들이 전승국으로서 배상을 받은 데 비해 우리는 '독립축하금' 명목이었다. 이는 국가 차원의 배상 문제는 해소된 것으로 해석될 수 있으나, 개인에 대한 배상과는 또 다른 측면이다. 또한 일제강점기 만행에 대한 공식적인 사죄가 빠져 있으며, 일제가 강탈한 우리 문화재를 일본 소유물로 인정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역사의 시계를 1904년 2월로 되돌려 보자. 일본의 강압에 의해 한일의정서가 체결된다. 일본이 한국 황실과 영토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구실과, 한국이 다른 나라의 침략을 받거나 내란 등으로 위험한 상태에 빠졌을 때 일본이 한국 내의 필요한 지점을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2014년 체결된 지소미아(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는 이의 또 다른 버전인 셈이다.
한일의정서를 통해 일본은 한국에서의 정치·군사·경제적 이익을 확대하게 된다. 다른 한편으론 한국 내에 친일단체를 조직하여 보호조약의 필요성을 민심 저변에 세뇌하는 가운데 이토 히로부미 일행을 한국에 파견한다. 이들은 1905년 11월 17일, 군대를 동원해 궁궐을 에워싸고 대한제국 황제와 중신들을 온갖 방법으로 협박하기에 이른다.
이른바 을사늑약(을사조약)이 체결되는 치욕의 순간이다. 즉 "일본 외무성은 한국의 외국에 대한 관계 및 사무를 통리 지휘한다. 차후로는 한국 정부가 일본 정부의 승인을 거치지 않고는 어떠한 국제적 조약이나 약속도 할 수 없다. 한국 황제 밑에 1명의 통감을 두어 한국의 외교에 관한 사무를 관리한다"로 되어 있다.
이는 한국 외교권을 빼앗기 위해 일본이 총칼을 앞세워 강제적으로 맺은 조약이다. 그야말로 일제 강점기를 알리는 서곡에 다름 아니었던 셈이다. 이에 앞장선 을사오적에는 매국의 끝판왕 이완용을 비롯해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 이름이 거론된다. 민족사적 맥락에서 볼 때, 역사에 천추의 한을 남긴 매국노의 전형이 아닐 수 없다.
1905년 12월, 일본은 서울에 조선총독부 전신인 통감부를 설치하고 초대 통감 겸 주둔군 통수권자로 이토 히로부미를 임명한다. 고종 황제는 한국의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기 위해 1907년 6월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열사 등 밀사를 파견해 을사늑약 무효화를 정식의제로 상정하려 했으나 일본 대표 고무라 쥬타로의 사전 방해공작으로 인해 무위로 그친다.
이를 보고받은 통감 이토는 고종에게 섭정을 강요했다. 온갖 협박을 견디지 못한 고종은 7월 19일 조서를 내려 황태자의 섭정을 발표한다. 이때 이토는 섭정을 양위로 조작하여 고종을 퇴위시킨다. 곧장 일본은 한일신협약을 맺어 통감이 한국 내정을 간섭하였을 뿐만 아니라, 각부에 일본인 차관을 두어 통감 정치를 강행하는가 하면 한국 군대도 해산한다.
고종을 강제 퇴위시킨 이토는 정미7조약을 체결해 조선 정부의 법령 제정, 고등관리 임명권 등을 빼앗았다. 신문법을 공표해 언론을 탄압할 기초를 마련했으며, 보안법을 마련해 집회와 결사를 금지했다. 또한 군대 해산령까지 내려 조선을 완전히 무력화시켰다. 이로써 조선은 내정권, 외교권, 군권을 모두 잃게 되었다.
이러한 소식이 알려지자 조선 민중들 사이에서 격렬한 항일 운동이 벌어졌다. 전국적으로 의병들이 조직되어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그러자 이토는 의병 항쟁을 매우 잔혹하게 짓밟고, 신문법, 보안법, 학교령 등을 더욱 강화하며 조선인 탄압에 나섰다. 일본의 조선 침탈 작업은 이토의 구상에 의해 차곡차곡 완성되어 갔다.
군인 신분을 빼앗겼던 대부분의 사람도 의병에 적극 가담했다. 1907~1909년에 의병활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던 요인이 된다. 이들은 일본군과 경찰을 상대로 습격에 나서는 등 한국 내정을 마비상태에 빠뜨리기도 했다. 반면 한국 친일분자들은 통감부를 출입하며 온갖 형태의 이권 개입에 나서는 등 치부 쌓기에 혈안이 되었다.
그런 가운데 만주 문제를 놓고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 문제가 대두된다. 통감직에서 물러나 추밀원 의장으로 일본에 있던 이토 히로부미가 이의 해결을 위해 만주 하얼빈로 향한다. 이를 전해 들은 안중근 의사가 이토를 제거할 결심을 세운다. 마침내 이토가 사정권에 이르자 그의 가슴을 향해 권총 여러발을 발사한다. 1909년 10월 26일 있었던 의거다.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 죄목에 대해, 명성왕후를 살해하고, 대한제국 황제를 강제로 폐위시켰으며, 양민을 학살하고 이권을 약탈하는 등 동양 평화를 해쳤다는 내용을 열거하고 대한의용군 사령의 자격으로 독립전쟁을 한 것이라고 밝혔다. 동아시아 식민지 정책을 구체화하고 실행했던 이토에 대한 판결문이었던 셈이다.
이보다 앞서 서양에서 도입된 신식 무기를 앞세운 일본의 기세 앞에 대한제국의 운명은 무기력 그 자체였다. 1904년 한일의정서, 1905년 을사늑약, 1907년 정미 7조약 이후에도 1909년 기유각서를 통한 사법권 박탈, 1910년 6월에는 한일약정각서로 경찰권까지 박탈했다. 대한제국은 명목상으로만 국가였을 뿐, 사실상 주권이 없는 상태였다.
급기야 1910년(경술년) 8월 22일, 한국 이완용과 일본에서 파견된 2대 통감 데라우치가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한다. 1주일 후인 29일에 순종황제 조칙 형태로 발표된 이 사건은 한일병탄, 경술국치로 불리며 일제강점기가 됐음을 뜻한다. 그러나 발표된 조칙에는 행정 결재에만 사용하던 옥새가 찍혀 있을 뿐, 대한제국 국새가 찍혀 있지는 않았다. 순종황제 서명도 없었다.
더욱이 한국이 아닌 일본이 임의로 작성한 내용을 토대로 강제된 것이라는 점이다. 이는 한일병합조약이 대한제국의 정식 조약이 될 수 없으며, 따라서 원천무효에 해당됨을 의미한다. 우리 대법원도 이를 무효로 판결했다. 이승만 정부 이후 지금까지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 입장이기도 하다. 1965년 한일협정을 통해서도 확인된 사실이다.
그와 함께 국제법상 조약 체결은, 조약 체결 대리인에 대한 강제와 협박을 통해 이루어진 것은 계약이 일반 원칙을 벗어난 사안으로 조약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여긴다. 때문에 우리는 일본 제국주의가 불법적으로 강제 점령했다는 뜻인 일제강점기로 표현한다. 이를 타파하기 위해 선조들이 목숨을 걸고 독립을 위해 헌신한 것이다.
을사늑약 또한 동일 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다. 해당 조약에는 위임장과 비준 그리고 조약의 제목과 표제도 없이 무력을 앞세운 강압에 의해 체결됐기 때문이다. 국제사회에 알려진 이듬해인 1906년 프랑스 법학자 프란시스 레이가 발표한 논문에서 을사늑약이 전권대사의 인격에 가해진 강박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절대 무효라고 주장했다.
그는 "도덕적으로 비열한 방법과 물리적인 강박으로 조선 정부를 강요해 체결된 것"이라고 비난했다. 해당 논문은 미국 국제법학회가 국제조약법 제정을 위해 하버드 법대에 의뢰해 제출받은 보고서의 기초가 된다. 1935년 국제법학회에 제출된 하버드 보고서는 프란시스 레이의 논문을 인용하며 을사늑약은 조약 체결의 구성 요건을 갖추지 못한 무효조약으로 규정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인 1920년에 국제 평화 유지와 협력 촉진 목적의 국제연맹이 설립된다.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둔 최초의 국제 평화 기구로, 국제 분쟁의 평화적 처리에 일정 부분 공헌한 바 있으나, 전쟁을 막지 못하는 등 사실상 무기력했다. 1945년 UN(국제연합)이 창설되며 그 이듬해 해체됐다.
국제연맹은 1935년 국가간 조약법에 관한 하버드 보고서를 통해, 그간 체결된 국가간 조약 가운데 대표적인 무효조약 3개를 발표한다. 1773년 러시아군이 폴란드 의회를 포위하고 폴란드 분할 조약을 강요한 사건, 1915년 미군이 아이티 의회를 포위하고 보호조약을 체결한 사건, 1905년 일본이 대한제국에 강압으로 체결한 을사늑약이다.
해당 보고서는 유엔 국제법위원회(ILC)에 그대로 계승되어 1963년 진행된 유엔 국제법위원회의 조약법에 관한 논의에서 거의 대부분 수용된다. 즉 “강제와 협박에 의한 조약의 서명, 비준, 수락 또는 승인은 무효"임을 밝히며 국제법상 조약 체결의 원칙으로 자리 잡게 된다. 을사늑약, 경술국치 모두 조약 체결 과정의 강압과 하자로 인한 국제법상 대표적인 무효조약인 셈이다.
1963년 국제연합 총회에 제출된 국제법위원회 보고서에도 “교섭자 뿐만 아니라 입법부의 구성원에 대해서도 비준을 얻기 위한 강제를 가하였다고 비난받는 많은 실례를 역사는 제공하고 있다”며 그 실례로 “보호조약의 수락을 얻기 위해 한국 황제와 그 각료들에게 가해진 강제”를 다른 사례들과 함께 서술하고 있다.
그런가하면 1938년 9월 30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정상이 만나 뮌헨협정을 체결한다. 체코슬로바키아 영토인 주데텐란트 영유권을 나치에게 양도하는 대신 독일이 더 이상 주변국을 침략하지 않는 것을 골자로 한다. 논의에 참여조차 못한 체코슬로바키아는 애초 이를 반대했으나, 국제관계 역학에 따른 약소국 한계를 절감하며 순식간에 전체 국토의 30%를 내어주고 만다.
이같은 사건은, 전쟁 방지 명분을 내세운 영국 수상 체임벌린의 4강 회담 제안을 히틀러가 받아들이며 성사된 결과다. 체임벌린은 "명예로운 평화를 가지고 독일에서 돌아왔다"며 "이것이 우리시대를 위한 평화임을 믿는다"고 외쳤다. 평화를 지켰다며 영국 민중의 열렬한 환영을 받은 체임벌린 손에 "독일은 더 이상 영토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히틀러 친필 서명이 담긴 서약서도 들려 있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6개월 후 독일은 체코슬로바키아를 강제로 병탄하며 해당 문서는 휴지조각이 되고 말았다. 체임벌린이 의기양양했던 "우리 시대를 위한 평화"는 고작 6개월 동안 유지되다 깨져 버린 꼴이다. 체코슬로바키아를 독일 수중에 내주며 희생시킨 대가로 유럽이 맛본 평화는 기껏 반년에 불과했다.
1939년 3월, 히틀러가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 에밀 하하를 베를린으로 불려들여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에 서명하도록 협박한다. 체코를 독일 직할 보호령으로 만들고 슬로바키아를 독립시켜 독일 괴뢰국으로 삼는 내용 등이다. 독일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프라하를 폭격해 쑥대밭으로 만들겠다는 협박도 가한다. 강압적으로 체결된 이 조약 또한 국제법상 무효다.
같은해 9월 1일, 히틀러 명령을 받은 독일군이 폴란드를 침공한다. 이에 영국, 프랑스가 독일을 향해 선전포고를 하며 제2차 세계대전으로 확전된다. 숱한 사람이 희생되거나 불구가 됐다. 물적 피해도 천문학적 규모에 이른다. 전범국인 독일은 막대한 전후배상을 해야 했으며, 현재까지도 그에 따른 사죄를 거듭하고 있다.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 것일까?
* 필자 : 정성태(시인/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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