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태 [기타]

정(鄭)씨의 본관 및 온양정씨(溫陽鄭氏) 연혁

시와 칼럼 2008. 12. 2. 2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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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鄭)씨의 본관 및 온양정씨(溫陽鄭氏) 연혁

정씨의 본관은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247본, 동국만성보(東國萬姓譜)에 35본 등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현존하는 정씨의 본관은 30본 미만이다.

정씨는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 육촌(六村) 중 취산 진지촌장(珍支村長) 지백호(智白虎)가 서기 32년(신라 유리왕 9)에 본피부(本彼部)로 바뀌어 불리면서 정씨의 성을 하사받아, 서산과 낭야정씨를 제외한 모든 정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 온양정씨(溫陽鄭氏) ::

 

  ▣ 유래 1

 

 시조 : 정보천(鄭普天)
시조 정보천(鄭普天)은 고려 때 은청광록대부 호부상서(銀靑光祿大夫 戶部尙書)를 지냈고 그의 선조에 대한 기록은 없어서 고증 할 수 없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탕정군(湯井. 온양의 옛이름)은 백제지역으로 고려 태조가 유금필(臾黔弼)과 함께 이곳 탕정군에 왔을 때 고을 관리에 공이 있음을 보고 정씨에게 관을 제수(除授)하고 그 후손들은 그 군의 향직(鄕職)인 호장(戶長)이 되게 했다고 한다. 그래서 후손들이 온양을 본관으로 했다.
 

▣ 유래 2

시조 정보천(鄭普天 : 시호 貞僖)은 고려조에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호부상서(戶部尙書)를 지냈다. 그의 선계는 상고할 수 없으나 전하는 바에 의하면 고려 태조가 유검필(庾黔弼)에게 명하여 탕정군(湯井郡: 탕정은 溫陽의 옛이름)에 성을 쌓을 때 정씨의 선조가 감독을 맡은 공으로 벼슬을 주고 그의 자손은 대대로 그곳 호장(戶長)을 맡도륵 한 것이 온양정씨(溫陽鄭氏)의 시초라고 한다. 시조의 묘소는 충남 아산시 온양읍에 있다.

 

▣ 인물 1
온양정씨는 조선조에서 상신(相臣) 2명, 공신 1명, 장신 1명, 문과 급제자 43명을 배출했다.

 

그 중 성재(省齋) 정순붕(鄭順朋)은 연산군 때 문과에 급제, 공조·병조참판·호조판서·대사헌 등을 거쳐 중종 때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었으며 인종이 승하하고 명종이 즉위한 후 왕실 외척인 소윤(小尹) 윤원형(尹元衡)과 대윤(大尹) 윤임(尹任) 사이에 싸움이 벌어지자 소윤측에 가담, 을사사화(乙巳土禍) 때 대윤 일파의 제거에 활약하였다. 그 공으로 보익공신(保翼功臣) 1등이 되고 우찬성(右贊成) 겸 지경연사(知經 事)를 거쳐 우의정에 올랐다.


정순봉의 후손에서 인물이 많이 나왔다. 그의 아들 장혜공(章惠公) 정렴(鄭렴)은 벼슬은 현감에 그쳤지만 중종·명종대의 학자로 유교(儒敎)·불교(佛敎)·도교(道敎)는 물론 천문(天文)·의술(醫術)·음룔(音律)에 정통하고 문장·산수화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순조 때 청백리로 유명한 숙헌공(肅獻公) 정만석(鄭晩錫)은 순봉의 7대손이다. 그는 순조조 홍경래(洪景來)의 난이 일어나자 평안도 위무사(平安道 撫使) 겸 감진사(監賑使)로 파견, 난이 끝난 후에는 평안도 관찰사가 되어 흥경래의 난으로 피폐된 민생을 잘 수습하여 생사당(生祠堂)이 세워지기까지 했다. 그 후 공조·이조·형조의 판서를 지내고 우의정에 올랐다.


정조 때 시파(時泥)의 거두였던 충숙공(忠獻公) 정민시(鄭民始)는 순붕의 9대손이다. 정조의 총애를 받았던 그는 오랫동안 선혜청(宣惠廳)에 있으면서 삼남(三南)의 진상품을 반감하고, 조세의 수납 사무를 통일하는 등 백성의 부담을 덜게 하였고, 특히 왕을 보필하여 문물의 개화에 크게 공헌했다. 또 현종 때 학자로 시문과 서예에 뛰어났고,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예조참판 등을 지낸 동명(東溟) 정두경(鄭斗卿)은 순붕의 현손이고, 정조 때 예조판서·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지낸 정창순(鄭昌順)은 9대손이다.


이 밖의 인물로는 임진왜란 때 왕을 의주로 호종하고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으로 온성근(溫滅君)에 봉해진 고송(孤松) 정희번(鄭姬藩), 인조 때 병자호란의 볼모로 심양(瀋陽)에 잡혀간 소현세자(昭顯世子)를 배종했다가 그곳에서 사형당한 충청공(忠貞公) 정뇌경(鄭雷卿) 등이 유명하다. 

 

  ▣ 인물 2
 

조선시대에 2명의 상신과 43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였다.


정순붕(鄭順朋)은 연산군 10년 문과에 급제하여 공조, 병조판서 등을 거쳐 중종 때 호조판서를 역임, 지중추부사가 되었을 때 인종이 죽고 명종이 즉위하자 소윤(小尹)으로서 대윤(大尹)을 제거하는데 적극 활약했다. 그 공으로 보익공신(保翼功臣) 1등이 되고 우찬성겸지경연사(右贊成兼知經筵事)에 승진하여 온양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이해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다.


정순붕의 7대손인 정만석(鄭晩錫)은 평안도에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자 평안도위사(平安道慰使)로 나갔고 난후에는 평안도관찰사가 되어 민생을 잘 돌보았으며 1829년에 우의정에 올랐다.


정현은 1545년 을사사화 때 윤임(尹任) 일파를 제거한 공으로 위사공신(衛社功臣) 3등에 올라 사섬사직장(司贍寺直長)이 되었으며 1551년 충훈부도사(忠勳府都事)가 되고 다음해 대호군을 거쳐 성천부사(成川府使)에 이르렀다.


정창순(鄭昌順)은 1757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고, 지평(持平)을 거쳐 1763년 호서감운어사(湖西監運御史)로 나갔으며 이어 正言(正言), 금천도찰방(金泉道察訪)을 지냈다. 그후 부교이수찬(副校理修撰) 등을 거쳐 정조 때 대사간, 대사헌, 함경도와 경상도의 관찰사 선혜청제조(宣惠廳提調) 등을 역임하고 예조판서에 이르렀다.


그밖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정유(鄭裕) 등이 있다.  

 
  ▣ 세거지
  -충북 중원군 하금면 장천리
-충남 서산군 소원면 아정리
-충남 아산군 인주면 대음리
-충남 천원군 광덕면 대덕리
-황해도 연백군 도촌면 오산리
-함남 갑산군 갑산면, 회린면
 
  ▣ 본관 연혁
   본관소재지 : 충청남도 아산
온양(溫陽)은 충청남도 아산시(牙山市)에 위치한 지명으로 본래 백제의 탕정군(湯井郡)이었다. 671년(신라 문무왕 11)에 탕정주(湯井州)로 승격되어 총관(摠管)이 파견되었다. 757년(경덕왕 16)에는 탕정군으로 강등되었으나 음봉현(陰峰縣)·기량현(祈梁縣)·평택현(平澤縣)을 영현으로 관장하였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온수군(溫水郡)으로 고치고, 1018년(현종 9)에 천안부(天安府)에 속하게 하였다. 1172년(명종 2) 현으로 강등되었다. 1414년(태종 14)에 신창(新昌)과 병합하여, 온창현(溫昌縣)이라 이름을 바꾸었다가 1416년에 다시 온수현을 분리하였다. 1441년(세종 23)에 왕이 온천에 행차한 후 병에 차도가 있어 온양군으로 승격되어 조선시대 동안 유지되었다. 이후에도 역대 왕들은 이곳 온천에 자주 행차하였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홍주부 온양군이 되었고, 1896년에 충청남도 온양군이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온양군은 아산군·신창군과 함께 아산군으로 통합함으로써 폐지되었다. 1941년 관할 군내면·서면·읍내면을 합해 만든 온양면이 온양읍으로 승격되었다. 1973년 인근지역을 편입해 면적을 확장하던 온양읍이 1986년에 시로 승격, 아산군에서 분리되었다. 1995년 온양시와 아산군을 통합하여 아산시가 되었다.
 
  ▣ 인구수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온양정씨는
1985년에는 총 5,689가구 24,134명,
2000년에는 총 7,599가구 24,897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鄭氏
본관은 옛 문헌에 210본 또는 247본이 기록되어 있으나 오늘날 전하는 것은 동래(東萊)·연일(延日)·해주(海州)·진주(晉州)·하동(河東)·초계(草溪)·온양(溫陽)·경주(慶州)·청주(淸州)·봉화(奉化)·광주(光州)·나주(羅州)·서산(瑞山)·김포(金浦)·야성(野城)·함평(咸平)·청산(靑山)·장기(長?·영덕(盈德)·곤양(昆陽)·서경(西京) 등 30여 본이다.

역사적으로 명벌(名閥)로서의 지위를 누려왔으며 특히 조선시대에 동래정씨(東萊鄭氏)를 으뜸으로 연일·청주·온양·진주·하동정씨 등이 상당한 세력을 폈다.

정씨의 원조는 《삼국유사》에 전하는 신라의 6촌(六村) 중 자산(山) 진지촌(珍支村:本彼部)의 촌장인 지백호(智伯虎:佐命功臣)이다. 본피부락은 현재의 경주시 중심부에 있었으므로 정씨는 일찍부터 한반도 남단에 자리잡고 살던 선주민(先住民)의 후예임이 분명하다.

오늘날 정씨의 각 본관별 시조들은 모두 지백호의 원손(遠孫)들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통념이지만 그 혈연적 계보(系譜)를 가려낼 방도는 없다.

일반적으로 정씨는 한 혈손이며 그 중 경주정씨가 큰 집이 된다는 데에는 별로 이론이 없는 것 같다. 다만 동성이족(同姓異族)으로서 서산정씨가 있는데 그 시조 신보(臣保)는 원래 중국의 저장[浙江] 사람으로 송(宋)나라의 원외부(員外部) 벼슬에 있다가 나라가 망하자 고려에 망명해 온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高麗史)》에 이름을 남긴 인물들로는 의종 때 명신 습명(襲明), 그의 6대 손인 몽주(夢周), 의종 때 무신정변을 주동한 중부(仲夫), 예종 때 학자·문인이었던 항(沆)과 그의 아들인 《정과정곡(鄭瓜亭曲)》의 저자 서(敍), 고려 당대의 시객(詩客) 지상(知常) 등이 두드러졌으며, 그 위세는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비로소 활짝 피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 31명의 상신(相臣)과 751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였다. 1975년도 국세조사에서는 가구수 29만 8291가구, 전국 가구구성비 4.4 %로 249성 중 제5위였고, 85년도 조사에서는 42만 2220가구, 178만 648명으로 성별순위는 274성 중 역시 제5위였다. 본관별 내력과 주요 인물을 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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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계정씨】 고려 초의 학자 배걸(倍傑)을 시조로 한다. 그의 아들 문(文)도 예종 때 형부상서·정당문학 등을 지내며 문명을 날렸다.

조선시대의 대표적 인물로는 광해군 때 온(蘊)을 들 수 있는데, 그는 스승 인홍(仁弘:瑞山鄭氏)이 대북파(大北派)의 권신(權臣)이 되자 절교하였으나 인홍이 참형을 당하자 아무도 돌보지 않는 시신을 거두어 장사지내 주었다고 한다.

10여 년 동안의 제주도 유배생활 중에 지은 《망북두시(望北斗詩)》 《망백운가(望白雲歌)》는 잘 알려져 있다. 이 밖에 중종 때 윤겸(允謙), 선조 때 청백리 종영(宗榮), 영조 때 훈련대장을 역임한 여직(汝稷) 등이 있다. 조선시대에 문과 급제자 57명을 배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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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정씨】 시조는 신라 때의 안일호장(安逸戶長) 회문(繪文)이고, 그 후손이 고려 초 호장을 지낸 지원(之遠)이다. 지원의 아들 목(穆)은 좌복야(左僕射)를 지냈고, 목의 아들 항(沆)은 문종·인종 때 우사간·충청도안찰사 등을 지냈으며, 항의 아들이 《정과정곡》으로 유명한 서이다.

조선시대에 정승 17명, 대제학 2명, 문과 급제자 198명을 배출했는데 상신(相臣) 17명은 왕손인 전주이씨의 22명에 버금가는 숫자이다.

동래정씨는 지원의 6세에서 교서랑(校書郞:輔)파와 첨사공(詹事公:弼)파의 2파로 대별된다. 이들 2파는 후대로 내려오면서 각각 여러 파로 분화하는데 첨사공파 중에서도 직제학공파(直提學公派)와 대호군파(大護軍派)가 주축을 이루고 있다. 직제학공파의 파조(派祖) 사(賜:세종 때 예문관직제학)는 아들 5명, 손자 10명을 두었으며 그중 셋째 아들 난종(蘭宗)은 동래정씨 중흥의 조(祖)라 할 수 있다.

난종은 세조~성종 때 훈구파(勳舊派)의 중진으로 이조판서·우참찬을 역임하였고, 문익공파(文翼公派)로 불리는 광필(光弼)은 그의 둘째 아들이다. 그 밖에 중종 때 대제학을 지낸 사룡(士龍), 선조 때 우의정 지연(芝衍), 숙종 때 우의정 재숭(載嵩), 헌종 때 영의정 원용(元容), 정조 때 우의정 홍순(弘淳) 등이 있으며, 대호군파는 여립(汝立)의 모반사건으로 몰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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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일정씨】 시조는 신라 때 간관(諫官) 종은(宗殷)이며 그 후손인 습명(襲明)을 중조(中祖)로 하는 지주사공파(知奏事公派)와 극유(克儒)를 중조로 하는 감무공파(監務公派)가 있다.

이 양파는 시조를 같이 하면서도 그 중간 계보를 잃어버려 서로 촌수를 헤아리지 못한다. 지주사공파에서는 몽주(夢周)가, 감무공파에서는 철(澈)이 잘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에 배출한 상신(相臣) 5명과 대제학(大提學) 3명 가운데 유성(維成:현종 때의 우의정)만이 몽주의 후손일 뿐, 홍명(弘溟:인조 때 대제학)·호(澔:영조 때 영의정)·우량(羽良:영조 때 우의정) 등은 모두 철의 집안이다. 이 밖에 지주사공파로는 유성의 손자인 양명학의 거성 제두(齊斗), 선조 때 임진왜란을 맞아 의병을 일으킨 대임(大任), 효종 때 학자 극후(克後), 고종 때 산수화에 능했던 문승(文升) 등이 있고, 감무공파로는 고려 공민왕 때 오천군(烏川君)에 봉해진 사도(思道) 등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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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주정씨】 시조는 고려 신종 때 전법정랑(典法正郞)을 지낸 숙(肅)이다. 고려시대 대표적인 인물로는 무신정변을 일으켜 8년 동안 무단정치를 폈던 중부(仲夫)를 들 수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태종·세종 때 호조판서 등을 지낸 역(易), 그의 아들로 세종 때 형조참판을 지낸 충경(忠敬), 그의 손자로 단종 때 형조판서를 지낸 종(悰) 등이 있다.

또 연산군 때 난세(亂世)를 예견하고 종적을 감추어 버린 일화의 주인공 희량(希良)은 역의 현손으로 시문에 능하고 음양학에도 정통했다. 선조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대장으로 활약하고 영흥부사·길주목사 등을 역임한 문부(文孚)는 역의 5대 손인 부사 신(愼)의 아들이다. 조선시대에 문과 급제자는 60명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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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정씨】 동성동본이면서도 족보가 다원화되어 있어서 전모를 파악하기가 어렵다. 진주정씨의 본고장인 경남 진주(晉州)에서는 강(姜)·하(河)·정 3성(姓)을 3대 성으로 치고 있지만, 그중 진주정씨에는 ‘진주8정(八鄭)’이란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서로 시조와 계통을 달리하는 8파가 있다.

조선시대에 상신(相臣) 1명을 포함하여 문과 급제자 59명을 배출했으며, 그 대표적 인물은 조선 문종 때 좌찬성을 지낸 분()을 들 수 있으며, 대표적 학자로는 선조 때 경세(經世)가 있고, 세종~세조 때 충청도관찰사와 중추원지사를 지낸 척(陟)은 특히 글씨에 능하였다.

성종 때 효자와 청백리로 유명한 성근(誠謹)은 척의 아들로서, 성근 집안은 대대로 효행이 이름났다. 그 밖의 인물로는 임진왜란 때 순사한 사제(思悌), 숙종 때 문신 필달(必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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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정씨】 고려 명종 때 서북면병마절도사·형부상서 등을 역임한 세유(世裕)를 시조로 한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상신(相臣) 1명, 대제학 1명 등 문과 급제자 58명을 배출했다. 조선 전기에는 세종 때 《농사직설(農事直說)》을 편찬한 초(招), 세종~세조 때 학자 인지(麟趾), 세종 때 수충(守忠), 성종 때 여창(汝昌) 등이 특히 돋보이는 인물들이다.

중기에는 광해군 때 택뢰(澤雷),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봉수(鳳壽)·기수(麒壽) 형제, 당대의 뛰어난 서예가였던 경흠(慶欽)과 충엽(忠燁), 지리학자로 《팔도도(八道圖)》를 제작한 상기(尙驥)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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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양정씨】 고려시대 호부상서를 역임한 보천(普天)을 시조로 한다. 조선시대에는 순붕(順朋:명종 때 우의정)·만석(晩錫:순조 때 우의정) 등 2명의 상신과 문과 급제자 43명을 배출하였다.

그 밖에 정조 때 시파(時派)의 거두였던 민시(民始)는 순붕의 9대 손이며, 현종 때 학자로 시문과 서예에 뛰어났던 두경(斗卿)은 현손이고, 정조 때 예조판서 등을 지낸 창순(昌順)은 8대 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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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정씨】 정씨의 도시조(都始祖)는 신라 초기 6부 가운데 본피부(本彼部:山 珍支村)의 촌장이던 지백호(智伯虎)라는 것이 통설이며 이른바 범정씨(汎鄭氏)의 ‘큰 집’격이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씨상계세보(鄭氏上系世譜)》에 따르면 경주정씨의 시조(중시조) 진후(珍厚:고려 平章事)는 지백호의 40대 손이 된다. 조선시대에 문과 급제자 22명을 배출하였는데, 그중 희계(熙啓)가 잘 알려져 있으며, 임진왜란 때 장렬하게 전사한 발(撥)은 희계의 5대 손인 군수 명선(明善)의 아들이다.

이 밖에 세종 때 좌찬성이 추증된 지년(知年), 명종 때 성리학의 대가 지운(之雲)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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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정씨】 시조는 고려시대 보승별장(保勝別將) 극경(克卿)이다. 조선시대 역대 인물로는 세종 때 우의정을 지낸 탁(擢), 선조 때 좌찬성을 지낸 곤수(崑壽), 선조 때 좌의정을 지낸 탁(琢), 광해군 때 대사헌을 지낸 구(逑) 등 당대의 거유(巨儒)·명신이 있다.

탁은 조선 개국공신 1등에 책록되어 도전(道傳)과 함께 《고려사(高麗史)》를 편찬하였으며, 곤수는 대명(對明) 외교의 1인자로 청백리에도 올랐고, 구는 예학자(禮學者)·문장가로 산수·병진(兵陣)·의약·풍수에 능통하였으며, 장현광(張顯光)·심지택(沈之澤)·허목(許穆) 등이 그의 제자였다.

탁은 임진왜란 때 곽재우(郭再祐)·이순신(李舜臣)·김덕령(金德齡) 등 명장을 발탁하였고, 이순신을 감옥에서 구출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에 문과 급제자 19명을 배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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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정씨】 시조는 고려 말 밀직부사를 지낸 영찬(英粲)이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조선 태조 때 개국공신으로 영의정을 지낸 도전(道傳)과 그의 증손으로 연산군 때 우의정을 지낸 문형(文炯)을 들 수 있다.

도전은 조선의 기틀을 잡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도읍을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기고 경복궁을 비롯한 궁전·궁문에서부터 도성의 8대문, 성내(城內) 48방(坊)의 이름을 짓고 《고려사》를 편찬하였으며 성곽의 수축, 역참(驛站)의 설치 등 여러 가지 규모와 시설과 정책이 그의 머리에서 나와 그의 손으로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