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태 [뉴스]

러시아 문호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타계

시와 칼럼 2008. 8. 4.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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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Aleksandr Isayevich Solzhenitsy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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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제니친, 옛 소련 억압-자본주의 타락 지적/한겨레신문
‘더 나은 사회’ 향한 갈증 표출해 와
한겨레 황보연 기자
사망한 솔제니친 발자취

3일 밤 타계한 러시아의 반체제 작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강제수용소’로 대표되는 옛소련 체제의 억압성을 신랄하게 폭로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서구 자본주의 사회의 타락성도 동시에 지적하는 등 끊임없이 ‘더 나은 사회’를 향한 갈증을 표출해왔다고 <에이피>(AP) 통신 등 주요 외신들이 전했다.

 

1918년 카프카스 키슬로보드스크시에서 태어난 솔제니친은 대학에서 물리와 수학을 전공한 평범한 과학교사였지만, 스탈린주의에 대한 비판의식이 싹트면서 인생의 일대 전환점을 맞는다. 2차대전 직후 군대에 입대한 솔제니친은 스탈린의 분별력을 의심하는 편지를 친구에게 보냈다. 이를 이유로 솔제니친은 8년 동안 강제수용소 생활을 감내해야 했다. 뒤이어 반체제 세력을 특정 지역으로 보내는 형벌이었던 ‘유형’ 생활까지 그는 카자흐스탄에서 치렀다. 강제수용소의 몇 안되는 생존자로서, 그는 “스탈린주의자들이 소련의 시민들을 폭군이나 반역자, 죄수가 되도록 강요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다시 러시아로 돌아온 솔제니친은 당시 개혁세력인 흐루시초프가 공공연하게 스탈린을 비난한 것에 힘입어, 1962년 자전적 소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출간한다. 그를 순식간에 저명한 작가로 바꿔버린 대표작이다. 하지만 흐루시초프의 권력이 약화된 뒤에는 다시 국가보안위원회(KGB)의 탄압이 강화돼 고초를 겪었다. 1970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지만 러시아로 돌아오지 못할 것을 우려해 시상식에 불참한 것도 이 무렵이다. 1973년 옛소련 수용소의 인권 유린 실태를 생생하게 고발한 <수용소 군도>의 출간으로 이듬해 체포됐으며, 당국이 추방하자 미국 망명에 올랐다.

 

솔제니친은 소련 체제가 몰락한 뒤인 1994년에 다시 조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서방 국가들에 대한 비판을 수용하지 않았던 미하일 고르바초프나 보리스 옐친 전 대통령과는 거리를 뒀다. 그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군대가 동구권 국가인 세르비아를 공격하고, 서방 국가들이 싼값에 러시아의 풍부한 자원을 사들이는 것에 대해서도 늘 불편한 심기를 보였다.

 

그는 2005년 6월 한 러시아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의 15년은 잃어버린 시절이나 마찬가지”라며 “더 자유로운 사회를 향해 너무 빨리 움직여선 안되며, 더 나은 사회를 위해선 천천히 갈 필요가 있다”고 꼬집었다. 결국 솔제니친은 러시아가 옛소련 체제도 서구 자본주의도 아닌 ‘그들만의 사회’를 뿌리내리길 바랬던 러시아 공동체주의자로 평가된다.

 

부인 나탈리아는 이미 세상을 떠났으며, 피아니스트인 스테판을 포함한 세 아들들은 모두 미국에서 살고 있다.


 황보연 기자 whyn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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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솔제니친/경향신문
입력: 2008년 08월 04일 18:04:13
 
1961년 소련 서기장 니키타 흐루시초프는 잡지 ‘노비미르’(Novy Mir, 세로운 세상)의 편집장에게서 소설 원고를 받는다. 흐루시초프는 “소비에트의 소시민이 열심히 노동하며, 순수한 열정으로 공산주의 건설에 충성하는 모습을 이토록 잘 묘사한 작품은 드물다”며 출판을 허락한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첫 소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는 이렇게 세상에 나왔다. 스탈린 사후 해빙기를 맞은 소련의 문단은 톨스토이를 이을 거장의 출현을 반겼고, 냉전의 반대편이었던 서방세계는 강제 수용소를 고발한 용기에 주목했다.

솔제니친은 농민 이반 데니소비치 슈호프를 68년 해외에서 펴낸 장편소설 ‘암병동’에서 수용소를 전전한 암환자 코스토글로토프로 이름을 바꾼다. 비판과 풍자는 강도를 더했다. 암병동은 소련 체제에 대한 노골적인 암시였다. 소련의 문단과 당국은 솔제니친을 의심했고, 반면 서방세계는 그에 대한 평가를 ‘반체제 문호’로 높였다. 솔제니친은 70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고, 소련에 직설적 비판을 가한 ‘수용소 군도’로 74년 추방된다.

솔제니친은 암병동에서 교수 출신의 늙은 환자 슐루빈의 말을 빌려 자신의 지향을 내비친다. “시키는 대로 다 했는데 결과는 뭔가”라며 신세를 한탄하던 슐루빈은 코스토글로토프더러 “그렇다고 젊은이! 잘못 생각해선 안돼. 이 참혹한 시대가 사회주의의 잘못은 아니야. 자본주의는 썩어가고 있어. 중요한 것은 이제부터라도 증오 대신 사랑을 가르치는 사회주의가 되어야 한다는 거야. 도덕적 사회주의 말이야”라고 말한다. 솔제니친은 소련 체제를 비판했지만, 자본주의를 결코 곱게 보지도 않았던 영원한 경계인이었다. 반체제에 주목했던 서방은 자본주의의 병리를 지적하는 ‘망명객’ 솔제니친에게서 흥미를 잃어갔다.

경계인 솔제니친이 엊그제 지상의 경계를 넘었다. 이로써 소련 ‘반체제 3인방’의 시대가 막을 내렸다. 89년 물리학의 양심 안드레이 사하로프 박사가 떠났고, 지난해엔 시대의 양심을 연주했던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가 첼로의 활을 멈췄다. 솔제니친은 “한 나라가 위대한 작가를 갖는다는 것은 또 하나의 정부를 갖는 것과 같다”고 했다. 솔제니친은 소련의 반체제 정부였다. 이제 예술만 남고 반체제는 역사가 됐다.

<유병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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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제 억압에 맞선 ‘러시아 문학의 양심’/경향신문

입력: 2008년 08월 04일 17:58:49
 
ㆍ타계한 러 작가 솔제니친
ㆍ‘스탈린 반대’ 편지 한 통으로 시작된 탄압의 삶
ㆍ‘반공작가’ 낙인 … ‘수용소 군도’로 노벨문학상

3일 타계한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체제로부터의 탄압에도 꺾일 줄 모르는 저항정신과 양심을 그의 생애와 문학을 통해 구현한 인물이다. 강제노동수용소에서 10년 가까이 복역한 경험을 바탕으로 러시아(옛 소련)뿐만 아니라 당대의 상황을 고발한 명작들을 내놓으면서 대문호 반열에 올라섰다.

솔제니친은 1918년 카프카즈의 키슬로보드스크시에서 유복자로 태어났다. 속기사였던 어머니 아래에서 10살 때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 심취하는 등 일찍부터 문학에 눈을 떴다. 대학 졸업 후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으나 1945년 친구에게 스탈린을 반대하는 내용의 편지를 썼다는 이유로 체포됐다. 이로 인해 그는 8년간을 감옥과 강제노동수용소에서 지냈고, 중앙아시아로 강제 추방당해 3년간을 더 보내야 했다.

1956년 복권된 솔제니친은 수학교사로 일하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데뷔작은 1962년 문학지 ‘노비미르’에 발표한 단편소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카자흐스탄의 중노동수용소에서 자그마한 종잇조각에 써내려갔던 원고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당시 노비미르의 편집장은 원고의 출판 여부를 결정하지 못해 공산당 서기장이었던 흐루시초프에게 보여줬는데 흐루시초프는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출판을 지지했다고 한다. 솔제니친은 이후 ‘마트료나의 집’ ‘크레체토프카역에서 생긴 일’ ‘공공을 위해서는’ 등의 작품을 잇달아 내놓으면서 작가로서의 입지를 굳혀갔다.

그러나 1964년 흐루시초프가 실각하고 문화활동에 대한 규제가 심해지면서 솔제니친은 많은 비난에 시달렸고 정부의 탄압정책에 항거하는 ‘반체제인사’로 떠올랐다.

그의 작품은 옛 소련에서 공식적으로 출판할 수 없게 됐으며 1969년에는 옛 소련 작가 동맹에서 제명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암병동’(1968) ‘1914년 8월’(1971) 등의 작품을 해외에서 펴내거나 자비 출판으로 암암리에 발표해야 했다. ‘암병동’은 죽음을 기다리는 환자와도 같은 소비에트 체제의 구조적 모순과 허구성을 적나라하게 폭로한 작품으로 그의 문학뿐 아니라 동시대 러시아 문학의 정점을 이룬 것으로 평가된다.

솔제니친은 1970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는 영예를 갖는다. 스웨덴 한림원은 그가 “러시아문학의 전통을 도덕적인 힘으로 추구한 점”을 수상 이유로 밝혔다. 그러나 그는 정부가 자신의 귀국을 허락하지 않을까 두려워 스톡홀름에서 열린 시상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1973년 옛 소련의 무자비한 인권 탄압을 기록한 ‘수용소 군도’가 출간되면서 정부의 탄압은 극에 달했다. 이 소설은 노동수용소의 존재를 스탈린뿐만 아니라 그 당시까지 신성시되던 레닌의 잘못으로 돌렸다. 결국 솔제니친은 반역죄로 체포돼 강제 추방당했다. 그는 스위스로 갔다가 미국 버몬트의 한적한 시골에 정착했다.

조국은 그를 버렸지만 그는 조국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나는 언젠가는 소련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작가는 조국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그는 사회주의체제가 무너진 뒤인 1994년 20년간의 망명생활을 마치고 조국인 러시아로 돌아갔다. 이후에도 텔레비전 토크쇼의 진행자로 활약하는 등 공산주의에 대한 향수와 물질주의 등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잃지 않았다.

‘반공작가’라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솔제니친이 반대한 건 인간을 억압하는 체제였지 공산주의가 아니었다. 그의 작품이 ‘고발문학’이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고, 지나치게 국수주의적이라는 비판도 있다. 하지만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불굴의 신념은 시대와 국경을 넘어 큰 영향을 끼쳤고, 그를 20세기 후반의 가장 중요한 러시아 작가로 자리매김시켰다.

<김진우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