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태 [뉴스]

박현모/정조가 ‘차마 다하지 않은 것들’

시와 칼럼 2008. 6. 26. 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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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5호 (2008.6.25)


정조가 ‘차마 다하지 않은 것들’


박 현 모 (한국학중앙연구원)



1792년 시월의 그믐날이었다. 정조는 창덕궁 춘당대에 나아가 활을 겨누었다. 왕위에 오른 지 16년 동안 한 해도 조용한 때가 없었지만, 유독 그해는 일이 많았다. 정월에 충청감사로 있던 박종악을 우의정으로 임명해 좌의정 채제공의 개혁정국에 힘을 보태라고 했건만, 어찌된 일인지 두 사람은 번번이 갈등하고 대립했다. 왕의 국정이념을 누구보다 잘 알고 따르는 두 사람이었지만, 여전히 당파적 색채를 벗어버리지 못하는 그들이 답답했다. 결국 박종악과 채제공을 모두 파직시키는 것으로 마무리됐다(각각 윤4월과 10월). 정조가 모처럼 구상한 ‘시파(時派)’ 중심의 내각이 무산되는 순간이었다.


화살이 과녁 중앙을 꿰뚫었음을 알리는 순기(巡旗)가 올랐다. 벌써 40발 째의 화살이 연속해서 적중했다. 옆에 있던 규장각의 신하들이 그것을 기리는 행사(古風)를 해야 한다고 아뢰었다. 그러자 정조는 “정 그렇다면 49발까지 연속해서 맞추면 그 때 가서 고풍을 청하라”고 말했다.


정조의 활쏘기와 ‘다 채우지 않음’의 미덕

  

생각해보면, 1792년 그해는 노론과 남인의 격한 목소리가 두드러지게 표출되었던 시기이기도 했다. 노론의 유성한은 “임금이 광대와 여자를 좋아한다”는 유언비어를 가지고 왕을 핍박했고(정조실록 16/4/18), 같은 노론의 윤구종은 이미 죽은 경종에 대해 “신하로서의 절개를 지킬 마음이 없다[無臣節]”고 버텼다. 그들은 “오로지 당론(黨論)”만을 지킬 따름이라고 하여 처형되었다(정조실록 16/4#/14).


그런가하면 영남의 남인 1만 여명은 사도세자의 억울함을 변석(辨析)해야 한다는 연명 상소를 올렸다. 이들 남인들은 사도세자가 원래 “고명(高明)한 학문과 예의바르고 장엄한 용모”를 지난 훌륭한 왕세자였는데, “음흉하고 완악한 무리들이 비밀리에 국가의 근본을 요동시키려는 계책을” 만들어 “차마 말할 수 없는 변고를 일으켰다”고 말했다(16/4#/27). 따라서 사도세자를 “참소하고 무함”했던 “큰 괴수로서 원수가 되는 자들의 이름”을 밝히고 “사도세자의 무함 입은 것을 깨끗이 씻어”내야 한다는 것이었다(17/5/28). 


“우리 선대 왕들의 활솜씨는 거의 신비의 경지에 이르렀다.” 48발까지 맞힌 정조가 신하들을 돌아보면서 말을 이었다. “그리하여 난을 일으키는 무리들을 모조리 제거하고 백번 싸워 대업을 이룩하셨다. 지금도 그 활과 화살이 함흥의 옛 궁에 간직되어 있는데, 그것은 마치 한 고조가 뱀을 베어버린 검과 같이 않겠는가.” 혼자 말처럼 내던진 왕의 이 말을 들은 신하들은 그 뱀이 과연 누구일까에 대해 각양의 추측을 하고 있었다.


그 즈음 노론은 남인의 약점인 천주교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1년 전인 1791년에 남인의 천주교 신도 윤치충 등을 처형시킨 데 이어 그 무리들을 “마땅히 큰 길거리에 목을 매달아 놓고 적의 무리를 호령하듯”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5/10/23). 이에 대해 정조는 노론의 약점인 ‘문체(文體)’를 들고 나왔다. 노론의 젊은 신료들이 청나라에서 유행하는 소설류를 탐독하고, 과거시험 등에서 패관 소품(稗官小品)의 문체를 모방하는 것을 거론한 것이다. 1792년 겨울에 동지정사로 중국에 가는 박종악 등에게 패관소기(稗官小記) 등 문체가 어그러진 책자는 일체 사오지 말라고 지시한 일이나(16/10/19), <평산냉연>이라는 소설을 보다가 파직되었던 이상황과 김조순 등에게 육경고문의 문체로 반성문을 써 올리게 한 일이 그 것이다(16/10/24).


“다 쏘는 것은 옳지 않다!” 49발의 화살을 적중한 후, 정조는 마지막 한 발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물론 이대로라면 백발백중의 자신이 있었지만, 다 채우는 것은 상서롭지 못한 일일뿐더러 정조 자신의 철학에도 벗어나는 것이었다.


드라마 <이산>과 뮤지컬 <화성에서 꿈꾸다>


지난주에 종영된 드라마 <이산>을 정조는 어떻게 평가할까? 아마도 “서론에 강하고 본론에 약한” 사극(史劇)이라고 말하지 않을까(실학산책 32호). 세손시절의 청년 정조가 보여준 신선함과 즉위과정의 긴장감이, 중반부의 궁중 내 권력쟁탈과 후궁들의 암투라는 진부한 레퍼토리로 많이 식상해져 버렸다. 설상가상으로 홍국영 이후 정조의 개혁정치를 보좌할 것으로 기대되었던 정약용의 캐릭터를 엉뚱하게 그려냄으로써 시청자들의 ‘몰입’을 방해했다. 그나마 궁중화원들의 활달한 대화와, 무인들과 시장상인들의 생기 넘치는 모습, 그리고 정치에서 포용과 우정의 중요성을 새롭게 그려낸 것이 마지막까지 20퍼센트대의 높은 시청률을 끌어갈 수 있는 힘이 아니었나 싶다.


<이산>의 가능성과 한계는 이달 상순 서울에서 공연되었던 창작뮤지컬 <화성에서 꿈꾸다>에서도 거의 비슷하게 나타났다. <한중록>으로 시작해 <화성행궁 진찬연>으로 끝냄으로써 내용의 완성도를 높이고 관점을 혜경궁으로 통일시킨 것 등은 재작년이나 작년의 공연보다 좋아졌다. 정조의 ‘피우고 싶은 꽃’이 무엇이었는지, 그 시대 백성들로 하여금 ‘풀잎처럼 일어서게’ 했던 저력이 무엇이었는지를 드러내는 데는 여전히 미약했다. 특히 진찬연 장면 이후 사족(蛇足)처럼 들어간 정조의 의문사 대목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연출자의 과욕이 아니었나 싶다. 3시간 가까이 되는 공연시간은 아무래도 너무 길었다. 연출자가 시나리오까지 직접 쓰다 보니 잘라내기 어려웠겠지만, 긴 여운이 남는 작품이 되기 위해서는 보다 과감한 결단이 필요했지 않나 싶다. 왕 자신이 모든 것을 직접 주관해서 취할 것과 버릴 것을 가려내지 못해,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친 역사적 사례가 얼마나 많은가.


채제공의 실수와 ‘차마 하지 않는 것’의 힘


1792년 구월과 시월 초순의 채제공의 태도가 그랬다. 좌의정 채제공은 자신의 조카 윤영희를 승지로 발탁하는 문제로 박종악과 첨예하게 대립했다. 비록 지나치게 노론 위주로 짜여 있는 관직 구성에 변화를 주기 위한 것이었다고는 하지만, ‘친척을 끌어올리려 한다’는 혐의를 받는 상황에서 “여러 신료들이 번갈아가며 공격하는 것을 일일이 다 대꾸하고 변명”한 것은 지나쳤다. 결국 그 일로 인해 채제공 자신은 물론이고 정조가 중시했던 남인의 이가환까지 궁지에 몰리게 한 것은 “참으로 개탄할 만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조는 이듬해 5월에 채제공을 영의정에 임명했다. 채제공에게 기대하고 있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즉


 “장수가 모두 용감한 나라도 없고 군사가 모두 용감한 군대도 없다. 따라서 별안간 갑작스럽게 비상을 걸어 징과 북을 울리고 갑옷과 병장기를 번뜩이며 함성을 지르면서 성지(城池)를 공격하게 하는 일은 꼭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기상을 일깨워 사람들 모두가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야 한다.”(정조실록 19/01/28).


한마디로 모든 사람들에게 다 기대를 걸 수는 없고 기개가 있는 채제공이 중요한 관직을 맡아 개혁정국을 강력히 이끌고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대목에서 특별히 주목되는 것은 “사람들 모두가 하지 않는 바가 있어야 한다(有所不爲)”라는 정조의 말이다. 사람들은 보통 벼슬길에 오르면 뛸 듯이 기뻐하고, 또 관직에서 쫓겨나면 다시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온갖 더러운 짓까지 한다. 그런데 채제공은 그런 보통 사람과 다른 ‘언행’을 보였다. 정조가 이복동생 은언군 만나는 일로 신하들과 대결상태가 지속되어 국정이 마비되자, 채제공은 여러 신하들을 이끌고 반대 상소를 올리는 등 ‘시파’이면서도 바른 말을 하는 정승이었다.


“사람은 하지 않는 것이 있은 뒤에야 큰일을 할 수 있다[人有不爲也而後 可以有爲].”(<맹자> 이루하8)는 맹자의 구절을 정조는 약간 변형해 사용하기도 했다. “평생에 하지 않는 것이 있은 뒤에야 비로소 남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할 수 있다[平生有所不爲 然後方能爲人所不能爲者]”라고 말한 적이 있다(<홍재전서>  제172권. 일득록)는 말이 그것이다. 그것이 일이든 재물이든 간에 욕심을 부리면 탈이 나며,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일하는 사람은 정작 중요한 일을 이루지 못할 거라는 자경(自警)의 말이었다.



좋은 정치가는 ‘나쁜 사람’과 ‘미친 사람’ 사이에


흔히 대권(大權)을 잡으면, 의욕적으로 수 십 개의 개혁 목표를 제시하곤 한다. ‘4대 개혁안’이니 ‘7대 국정목표’니 하는 것들이 그렇다. 그런데 그 속을 들여다보면 재임기간에 도저히 이룰 수 없는 내용들로 꽉 차 있는 경우가 많다. 5년 단임의 대통령이 온 나라를 바꾸어 놓겠다는 것 자체가 무리한 욕심이 아닐까. 물론 국민들의 기대 속에 뽑힌 지도자가 짧은 재임기간을 이유로 아무 것도 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나쁜 사람’이라고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반면 재임 기간에 온 나라를 바꾸겠다고 한다면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미친 놈’이라고 할 것이다. 결국 좋은 정치가는 ‘나쁜 사람’과 ‘미친 사람’ 사이에서 중용을 추구하는 사람일 텐데, 그 요체는 ‘하지 않는 바’에 있지 않을까.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을 ‘무소불위(無所不爲)의 힘’으로 착각할 것이 아니라, ‘유소불위(有所不爲)’라는 마음 자세로 접근해야 한다. 그래서 힘을 모으고 길러서 정말 중요한 한두 가지 일에 전력을 투자해야만 비로소 성공한 개혁가요, 뛰어난 지도자로 평가받을 것이다. 정조가 “사대부는 하지 않는 바가 있은 연후에야, 비로소 국사(國事)를 처리할 수 있다.(士大夫有有所不爲 然後方可以做國事)”(<홍재전서> 제172권. 일득록)고 말한 것은 바로 이런 이치 때문이었다. 정조가 1792년에 ‘차마 다 쏘지 않은 것’은 비단 나머지 화살만이 아니었다.



글쓴이 / 박현모

· 한국학중앙연구원 세종국가경영연구소 전통연구실장

· 저서 : 『세종, 실록 밖으로 행차하다 』, 푸른역사, 2007

          『정치가 정조』, 푸른역사, 2001

          『세종의 수성(守成)리더십』, 삼성경제연구소, 2006 등

· 역서 : 『몸의 정치』, 민음사, 1999

          『휴머니즘과 폭력』, 문학과 지성사, 2004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