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태 [칼럼]

우둔한 보수와 사악한 진보만 마구잡이 널뛰는 비루한 정치판!

시와 칼럼 2024. 5. 9.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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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 체제와 질서에 기반한 현상 유지 경향성을 보이는 것이 보수주의다. 불합리한 사회적 현상에 대한 급격한 변화 대신 기존의 짜여진 틀을 기반으로 안정성에 우선순위를 둔다. 문제 해결에 있어서도 점진적인 변화를 통해 상황을 극복하려고 한다.

보수주의 이념을 규정할 수 있는 근대적 체계가 갖춰진 것은 영국의 정치 이론가 에드먼드 버크(1729~1797)의 프랑스 혁명론에 기반한다. 자코뱅주의에 반대한 의회주의 입장이었던 그는 파괴적 방법론이 인간해방의 이상을 도리어 약화시킬 뿐만 아니라, 심지어 타락하게 만든다고 힐난한다.

급진적 변혁에 반대 입장이던 버크의 그러한 노선은 인간의 본성에 대해 기독교 원죄설을 바탕한다. 이는 개별 인간이 지닌 고유성과 주체성 대신 전통의 울타리에 순응시키려는 형태로 나타난다. 윤리적이고 책임 있는 자유와 권리 행사가 그로부터 가능하다고 여긴 때문이다.

이러한 유형은 무의식적으로 관습화된 인습에 따르는 것이 생존을 위한 미덕으로 삼는다. 따라서 검증되지 않은 일체의 혁명적 방법론에 대한 불신이 높고 또 배격한다. 반면 전통 체제에 대한 애정과 신뢰감이 두터워, 그것을 전제로 현상 타개에 나서려는 태도를 취한다.

그로 인해 개인이 지닌 고유한 가치와 자발성 그리고 인권이 억압되는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자유주의 또는 합리주의와는 대조를 이룬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에는 또 다른 독특한 양상을 보인다. 바로 화석화된 냉전적 이념이 그것이다. 이는 보수주의자와 자유주의자를 막론한다.  

특히 산업화 이후 개인주의적 문화가 확산되는 와중에서도 우리 사회에 배회하는 냉전적 사고는 여전하다. 심지어 특정 종파의 교조적 독선주의와 결탁된 형태도 있다. 이들은 끈질기게 이념 갈등을 부추기며 사회불안과 정치혼란을 야기한다. 보수를 참칭하고 있으나, 사실상 교주 1인에 의한 독선에 불과하다.

보수주의는 사회공동체 형성을 유기적이고 통일된 관계로 파악한다. 그러다보니 선험적 토대의 개선책마저 거부하는 극단성으로 흐를 수도 있다. 개인의 자유의지와 인권마저 편협하게 왜곡할 뿐만 아니라 함부로 훼손하기 십상이다. 이게 정치적 지배세력이 될 때 독재 또는 전체주의로 변질될 위험성도 높게 상존한다.

무엇보다 보수주의가 지향하는 고유 정체성은 전통과 인습을 존중하고 우선하려는 경향에 있다. 하지만 현실에 존재하는 제반 모순에 대해서도 커다란 사회적 혼란없이 개선하려는 의지를 지닌다. 그런 점에서 극단적 수구주의, 독재주의, 전체주의와는 구분된다. 혹여 그러한 성향을 보이는 부류가 있다면 더는 그것을 보수주의라 이름하기 어렵다.

물론 버크가 기독교적 원죄에 바탕을 둔 채 편견의 사회적 필요성을 내세운 측면도 있다. 인간이 교화되려면 가족, 종교, 귀족정치 속에서 교육을 받고 윤리적으로 잘 단련된 엘리트 집단을 본보기로 삼고 따라야 할 것이라고 강조한 점이다. 하지만 그것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당대 기독교의 냉소적 선민의식과는 결이 다르다.

버크는 오히려 보수주의가 시대와 역사 속에서 진화해야 한다는 점을 역설했다. 예컨데 토지귀족들이 시기적절할 때 위로부터의 개혁을 실천하고 권한의 남용없이 불문헌법의 내용을 준수한다면 언제까지나 '강인한 참나무'와 같은 바람직한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파했다. 전통 보수주의의 요체라 할 수 있다.

한국사회에 보수와 진보를 표방하는 두 정치 집단이 있다. 하지만 그게 타당한 것인지는 따져 볼 필요가 있다. 보수 참칭 집단에서는 모순적 사회현상에 대한 변화 의지가 우둔할만큼 빈약하다. 진보 참칭 집단의 경우에는 자기기만과 위선적 그림자가 너무 짙다. 사악하게 여겨질 지경이다. 한국 정치의 비루한 현주소가 아닐 수 없다.

* 필자 : 정성태(시인 / 칼럼니스트)